LIFE AT JOONGSIM

강의안

말씀을 배우고 삶으로 나누는 자료입니다.

주일찬양예배 [소요리문답 47문, 대요리문답 105문] "제1계명(3)"

 출애굽기 20 : 1 - 3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1.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47문과 대요리문답 제105문에서 제1계명이 금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47문 : 제1계명이 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제1계명이 우리에게 금하시는 것은 참 신을 하나님으로 알지 아니하거나 우리의 하나님으로 경배하지 않고 영화롭게도 하지 아니하는 것과 그에게만 합당한 경배와 영화를 다른 이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04문 : 제1계명에서 금지하는 죄들은 무엇입니까?

 답 : 제1계명에서 금지하는 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제1계명에서 금지하는 죄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섬기지 않는 무신론”입니다.

   2) “제1계명에서 금지하는 죄는... 참 하나님 대신에 혹은 그분과 함께 혹은 하나 이상의 여러 신들을 두거나 예배하는 우상 숭배”를 행하는 것입니다. 

   3) “제1계명에서 금지하는 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또한 우리의 하나님으로 모시지 않고 고백하지 않는 것”입니다. 

   4) “제1계명에서 금지하는 죄는... 이 계명이 요구하는 바 하나님께 마땅히 드릴 것을 무엇이든지 제하거나 게을리하는 것”입니다. 

   5) “제1계명에서 금지하는 죄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 하나님을 잊음, 하나님에 대한 오해, 거짓된 견해, 하나님에 대한 무가치하고 악한 생각들”입니다. 

   6) “제1계명에서 금지하는 죄는... 하나님의 비밀들을 불손한 호기심으로 캐내려는 것”입니다. 

   7) “제1계명에서 금지하는 죄는... 모든 신성 모독,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 자기 사랑,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8) “제1계명에서 금지하는 죄는... 우리 마음과 의지, 혹은 정서를 지나치고 무절제하게 다른 것들에 두고, 전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9) “제1계명에서 금지하는 죄는... 헛된 맹신, 불신앙”입니다.  

   10) “제1계명에서 금지하는 죄는... 이단, 그릇된 믿음, 헛된 맹신, 불신앙,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11) “제1계명에서 금지하는 죄는... 절망, 완강함, 심판에 대한 무감각, 완악한 마음”입니다.

 제1계명의 핵심은 하나님만 경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거나,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포기하고 절망하는 것은 제1계명 위반입니다. 

사람은 환경 때문에 때로 절망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에 가서 한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는 것을 보고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고 말하고 그 여인이  가지러 갈 때에 다시 불러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12절에서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에게 떡을 달라고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인 줄을 몰랐기에 절망의 말을 쏟아 놓았던 것입니다. 

때로 믿음의 사람들도 절망할 수 있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진행할 때에 동역자들과의 신학적 갈등, 농민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건강 악화가 겹치면서 루터는 심각한 우울증과 무력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루터가 사흘 동안이나 깊은 낙심에 빠져 서재에서 식사도 하지 않을 때, 그의 아내 카타리나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 상복을 입고 슬픈 표정으로 루터 앞에 나타났습니다. 깜짝 놀란 루터가 누가 죽기라도 했냐고 물었고, 카타리나는 ‘박사님의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데, 루터 박사님께서 어떻게 이토록 절망하고 누워만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당신의 모습을 보니 하나님이 돌아가신 게 틀림없어 보여 상복을 입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한 마디가 루터의 심령을 찔렀고, 자신이 처한 환경과 두려움에 매몰되어 살아 계시고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불신하고 절망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리에서 털고 일어났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때가 1527년에서 1530년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1849년에 단행본으로 출판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이 절망하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 ‘참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였습니다. 돈이 없어서, 환경이 나빠서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려 하거나(교만), 반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영적 가치를 포기할 때(약함) 인간은 필연적으로 내면에서부터 무너져 내린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절망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다윗도 사울 왕에게 쫓기면서 절망적인 상황을 만난 것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번이 사무엘상 30장에 기록된 것으로서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 편에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여할 뻔하다가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그 전쟁에 빠지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살던 시글락에 돌아와 보니 아멜렉 사람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그들의 아내와 자녀를 사로잡아 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다윗을 따르던 자들이 6절에 보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였고, 그 때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다윗과 함께 한 자들은 자신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혀 간 것을 인하여 절망에 빠져서 다윗을 돌로 치지고 하였으나, 다윗도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혀 간 동일한 상황에서 크게 다급하였으나, 여호와 하나님을 힘입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라하여 여호와께 묻기를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라고 물을 때 여호와께서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절망은 제1계명을 위반하는 죄입니다. 성도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나를 사랑하사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사랑하는 자녀에게 주시는 어려움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어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고, 하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가 되게 하시려는 시련인 줄 온전히 깨달을 때,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영혼과 생명(목숨과 삶)을 미쁘신 창조주 하나님께 의탁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심에 있어서 변치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실 전능하신 능력도 변치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12) “제1계명에서 금지하는 죄는... 완강함, 심판에 대한 무감각, 완악한 마음”입니다.

  완강함에 대해서 잘 말씀해 주시는 구절이 예레미야 5장 3절인데 “여호와여 주의 눈이 진리를 찾지 아니하시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지라도 그들이 아픈 줄을 알지 못하며 그들을 멸하셨을지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들의 얼굴을 바위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인하여 그들을 치심으로 징계하셨습니다. 징계의 목적은 그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들의 얼굴을 바위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완강함입니다. 완강한 자들은 행복한 순간에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으며, 괴로운 시간에는 하나님을 원망함으로써 제1계명을 어깁니다. 

  심판에 대한 무감각함에 대하여 이사야 42장 25절에서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을 이스라엘에게 쏟아 부으시매 그 사방에서 불타오르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라고 잘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받아서 사방이 불에 타고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것이 바로 심판에 대한 무감각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성도들은 모든 사건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습니다. 심지어 심판조차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고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모든 일을 ‘운명’과 ‘우연’으로 치부하기 때문에, 심판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완악한 마음은 영적 민감성을 완전히 상실한, 딱딱한 마음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모세 시대의 ‘바로’입니다. 그는 계속되는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출 7:13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신실했던 성도도 일시적으로 완악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윗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우리아를 살해한 후 나단 선지자를 만나기까지 한참 동안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그 완악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누렸던 생명의 교제를 잃어버렸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회개한 내용을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토로하였는데, 9절로 12절에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라고 은혜를 간구하였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고 회개할 때까지 그는 마음에 평강이 없었습니다. 완악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라고 기도한 것으로 보아서, 그의 심령에는 성령의 감동이 사그라졌고, 구원의 기쁨도 사라졌으며,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자원하는 심령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일시적으로 영적 민감성을 상실하고 딱딱하게 굳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고 있다면 얼른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13) “제1계명에서 금지하는 죄는... 교만, 뻔뻔스러움, 세속적인 안일함”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만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여기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잠언 16장 18절에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고 말씀하며, 야고보서 4장 6절에서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사야 14장에서 사탄 마귀가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12절로 15절에서 “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15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사탄 마귀는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교만 때문에 범죄하였고, 하나님은 반역을 행한 사탄 마귀를 구덩이 곧 맨 밑으로 떨어뜨리셨습니다. 교만은 자신을 그릇되게 높이는 것입니다. 교만은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린다는 점에서 제1계명 위반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왔으므로, 오직 하나님만 자랑하는 것이 피조물의 위치입니다. 

  뻔뻔스러움도 제1계명의 위반입니다. 뻔뻔스러움은 고의적인 불법 곧 알고도 죄를 짓는 것을 말하는데, 시편 19편 13절에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짓는 대부분의 죄는 알면서 짓는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양심을 통해 우리의 범죄에 제동을 거심에도 고의적으로 죄를 짓습니다. 우리가 뻔뻔스럽게 죄를 짓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애써 부인함으로써 제1계명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안일함도 제1계명의 위반입니다. 이 세속적인 안일함이란, 하나님 없이도 평안할 것이라고 믿는 마음입니다. 스바냐 1장 12절에서 “그 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평안할 것이라는 세속적 안일함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께 무관심한 태도로 이어지고 이는 온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겨야 할 피조물의 자세에 어긋난다는 점에서 제1계명 위반입니다. 

  14) “제1계명에서 금지하는 죄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 인간적인 수단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도 제1계명의 위반입니다. 사탄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두 번째 내용이 예수님을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 4:6)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말라 하였느니라”(마 4:7)는 말씀으로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하나님은 경배의 대상이지 시험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위험한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해야 할 책임을 다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대신 해결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것도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적을 보여 주시면 순종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질병과 사고를 미리 예방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과 건강을 지켜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믿고 순종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이것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제1계명 위반입니다.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도 제1계명의 위반입니다.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선한 목적을 위해 악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두고 정죄 받아 마땅한 태도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3장 8절에서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수단을 의지하는 것도 제1계명의 위반입니다. 예레미야 17장 5절에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인간적인 수단을 의지하는 것 자체가 죄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하신 제1계명의 위반이라는 말입니다. 병이 났으면 병원에 가서 진료와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사업 계획을 세우고 저축하는 것도 잘못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의사를 통하여 나를 치료하신다고 생각하지 않고, 의사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태도, 통장의 잔고가 충분하면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태도, 어떤 일을 이루고 성취하는 것을 하나님의 도움없이 내 힘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태도 등이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하신 제1계명의 의무를 위반하는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기 위하여 제구에 물맷돌을 넣고 나가 싸웠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물맷돌 실력을 의지하여 나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45절로 47절에서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라고 말하였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물맷돌’만 가지고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진정한 힘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었고,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승리를 주실 것을 믿고,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 확신함으로 나가서 싸울 때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도 믿음을 아들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고 하였습니다. 질병이 있을 때 기도만 하라고 하지 않고 당시의 치료 수단을 사용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방편을 사용하나 그 방편을 복되게 하시고 사용하시어 우리에게 건강과 승리를 주시고 주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게 하시는 모든 역사는 우리가 사용하는 방편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사용하시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