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AT JOONGSIM

강의안

말씀을 배우고 삶으로 나누는 자료입니다.

주일 낮예배 베드로후서 강론(8) "믿음의 기초 (1) - 친히 보고 들은 것- "

베드로후서 1장 16절로 18절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1. 지난 시간에 오늘 본문 16절 상반절의 말씀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력 가운데 구속을 이루셨고, 능력 가운데서 다시오실 재림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1) 이 서신을 받아 보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 박해라는 죽음의 위협과 재림은 없다고 말하는 이단의 유혹에 직면한 자들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라는 핍박과 또한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재림은 없으니, 이 땅을 중심으로 살아도 된다고 미혹하는 이단들의 유혹에 맞서서 끝까지 참된 신앙을 지키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영광과 그 나라를 위해서 살기 위해서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예수님께서 능력 가운데 강림하신다는 재림에 대한 소망으로 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베드로 사도는 강조하였습니다. 

  

 2) 이 재림 신앙은 예수님께서 오늘 당장 오실 수 도 있다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나 더 본질적으로는 다시 오실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주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삶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재림을 소망하는 성도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 3장 2절로 3절에서 “2...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며 자신을 절제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을 신전의식 또는 신현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전의식이라는 말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말이고, 신현의식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내 앞에 계시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며 살 때 현실의 모든 어려움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종교개혁자 칼빈이 사용한 용어를 빌리면 ‘코람데오’ 곧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칼빈은 이 삶에 대해서 그의 기독교 강요 1권 1장 3항에서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인간의 모습’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아주 흔하게 보도하듯이, 성도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마다 항상 두려움과 놀라움에 휩싸여 완전히 압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상시에는 확고하고 든든하게 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이 그의 영광을 드러내실 때에는 완전히 흔들려서 마치 죽음의 두려움에 휩싸인 것처럼 벙어리가 되어 버리며, 사실상 거기에 완전히 압도되어 거의 죽은 것처럼 되는 현상을 보게 된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과 자기 자신을 비교해 보기 전에는 절대로 사람이 자기 자신의 비천한 상태를 완전히 깨닫고 알았다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사사기와 선지서에서 이처럼 깜짝 놀라는 예가 무수히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라’는 식의 표현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아주 흔하게 일상적으로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까이 바라본 후 자기가 티끌이요 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깨달았으며(창 18: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또한 엘리야도 맨 얼굴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다가오심을 견디며 기다릴 수가 없었을 만큼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그렇게 위엄이 있었던 것이다(왕상 19: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는 죄가 없는) 그룹들조차도 두려움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는데(사 6: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과연 썩은 물건이요(욥 13:28 “나는 썩은 물건의 낡아짐 같으며 좀 먹은 의복 같으니이다”) 또한 벌레(욥 7:5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대체 어떻게 하겠는가? 라고 말하였습니다. 

 칼빈의 말을 좀 더 쉽게 말씀을 드리면,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될 때 두려움과 놀람에 휩싸이게 되는데, 이사야 선지자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하나님을 뵈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죽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으며,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자신은 태끌과 먼지라고 고백했고, 욥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자신은 썩은 물건이요, 벌레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처럼 신전의식(코람데오)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적인 위엄을 깊이 깨달은 성도는, 세상의 어떠한 핍박이나 이단의 위협보다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하게 됩니다. 참된 경외의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 때, 현실의 고난이나 이단의 유혹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매 순간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서 있다는 ‘신전의식’과 그분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라는 ‘산 소망’이 결합될 때 성도는 강력해집니다.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코람데오의 삶이 성도의 현실의 고난과 이단의 유혹을 이기고 기쁨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3) 이 시간은 오늘 본문 16절 하반절로 18절에서 베드로 사도가 증거 하는 바, 거룩한 산에서 예수님의 변화되신 것을 목격한 베드로 사도가 전하는 진리, 곧 성도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한 성도의 믿음의 기초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성도의 신앙과 본분의 유일한 규범은 오직 성경입니다. 

  

 장로교 헌법 책 맨 앞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압축하여 12신조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 12신조와 대소요리문답 그리고 신앙고백서를 믿고, 특별히 12신조를 나의 신조로 받는다는 승인식이 있어야 장로교 목사와 강도사 장로와 집사로 임직을 할 수 있습니다. 이 12신조 제1항에서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본분의 유일한 법칙이 될 수 있는 것은 성경이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의 믿음의 근거인 성경이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를 가지지 못한다면, 만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믿을 만한 근거가 없는 성경을 기초로 한 기독교 교리나 그 구원 교리를 믿는 성도의 신앙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헛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과연 믿을 만한 책인가? 과연 사실에 기초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가?’ 하는 점이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증거 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 거짓 선생들은 사실이 아닌 말을 꾸며 내지만, 나는 그들처럼’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라서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베드로 사도는 친히 본 것, 그리고 18절에서는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고 말씀하는 대로 오직 ‘보고 들은 것’만을 증거하였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이미 예수님께서 높은 산이요, 거룩한 산에서 변모되셨을 때 눈으로 본 사실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변모되신 것을 눈으로 목격한 산 위에서 실제로 체험한 역사적인 그 사실에 비추어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할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 다르게 표현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도 이 믿음이 헛된 것이 아니라 참된 것이며,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믿음의 결국 영혼의 구원을 받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영원토록 참여하는 영생의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이 구원에 대하여 증거 하는 성경의 모든 증거가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3. 설교의 황태자라 불리는 스펄전은 참된 설교는 교리적, 체험적, 실천적인 설교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목회하던 교회가 성장하여 성도들을 다 수용할 수 없게 되자 뉴 파크 스트리트 예배당을 대신하여 메트로폴리탄 터버내클 예배당을 건축한 후 행한 첫 번째 설교인 1861년 3월 25일 설교에서 사도행전 5장 42절 말씀을 가지고 “터버내클에서 첫 번째 설교”라는 제목으로 ‘이 강단이 서 있는 한, 이곳에서 전파될 유일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라는 것을 천명하면서 말씀을 증거 하였습니다. 

  

 1) 그의 설교 두 번째 단락에서 스펄전은 복음 사역자를 교리 중심, 체험 중심, 실천 중심의 설교를 하는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참된 설교자는 이 세 부류 중에서 어디에 속해야 하는가를 말하면서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설교자라면 교리적이고, 체험적이고, 실천척인 설교를 하는 설교자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첫째로 ‘교리 중심’으로만 설교한다면 교리적으로는 건전하지만, 영적으로는 침체에 빠지게 된다고 말하면서 150년 전 침례교회가 그러했다고 말하였습니다.

 교리만을 강조하게 되면 여기서 더 나아가 선교와 전도를 말하지 않음으로 교리만을 파수하기 위하여 열정적으로 서로 싸우기만 한다고 진단하였습니다. 

 둘째로 ‘체험 중심’의 설교자에 대해서 말하면서 체험 중심의 설교를 하는 자들을 ‘경험적 설교자’로 불렀는데, 이것은 이들이 ‘신자들의 내면적 경험을 중심하는 설교’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는 의심과 두려움, 기쁨과 황홀경을 다루는 설교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직 ‘경험’만 강조하는 설교는 인간 마음의 부패함만을 줄기차게 설교하는데, 이를테면 그들은 “율법에 의해서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듯 한 고통을 겪지 않는다면, 매일 자신의 마음이 완전히 썩어 문드러졌음을 절감하지 않는다면, 온전한 확신과는 거리가 멀어 늘 의심과 두려움 속에 살지 않는다면, 그리고 마치 잿더미 위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자신의 몸을 긁어내는 처지가 아니라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라고 경험적 설교자들이 주장했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율법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실 때 사람은 그 죄를 깨닫고, 애통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를 이 죄에서 구원하여 주실 이가 예수님뿐인 줄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죄를 가지고 단번에 그 죄를 씻는 샘이신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지 않게 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죄 문제에만 집중하게 하는 것은 신자들을 나약하고 무기력한 상태로 만들거나, 아니면 영적으로 죽고 썩어버린 상태로 몰아넣는 것이라고 하면서, 죄 문제에만 집중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보다는 내면의 부패함이 더 크게 드러나며, 그들에게서 풍기는 냄새는 (죄인을 치유하시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향유가 아니라 썩고 더러운 마음에서 나는 악취가 되고 만다’고 경고를 하였습니다. 

  

 셋째로 ‘실천적 설교자’는 어떤 설교자인가를 말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거룩한 의무를 행하도록 열정을 북돋우며, 모든 훌륭한 목표를 장려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다른 두 유형의 사역자들을 훌륭하게 보완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실천’만을 강조하는 설교자의 가르침 아래에 앉아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일 년 내내 그의 설교를 듣고,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늘 똑같은 소리뿐이야. ‘행하라, 행하라, 행하라… 오직 행하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지.’ 저기 앞 계단을 내려가는 불쌍한 죄인을 보십시오. 그를 따라가 보면 이런 탄식이 들려옵니다. ‘아,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실 수 있는지 알고 싶어 이곳에 왔는데, 정작 들은 것은 내가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뿐이군.’ 이는 매우 큰 문제입니다. 이런 가르침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메마르고 굶주린 상태가 되고 맙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스펄전은 모든 설교는 이 세 가지가 균형을 이룬 설교 곧 교리적이고, 체험적이고, 실천적인 설교를 해야 하는데, 누가 교리적이며, 체험적이며, 실천적인 설교를 함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바른 교리를 붙들고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체험을 누리고 성경의 교훈을 실천할 수 있게 할 수 있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설교자가 교리적이고 체험적이며 실천적인 설교자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 설교한다면 필연적으로 교리를 설교하게 되는데, 언약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전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무조건적인 선택의 교리를 전해야 하고, 그 분의 십자가의 피를 증거 할 때에는 오직 택한 백성에게만 그 대속의 은혜를 베푸시는 제한 속죄, 효과적인 속죄에 대해서 말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스펄전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보다 더 분명한 체험적인 설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그 고난을 이기는 자가 되기를 설교하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고뇌와 피땀, 십자가의 고난을 전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고난을 이기는 길은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의 교제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기쁨에 대해서 설교하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재림에 대해서 설교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보다 더 실천적인 설교는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분은 모든 덕목의 본보기이시며, 인간 인격의 완전함을 비추는 거울이십니다. 거룩하고 칭찬받을 만한 모든 것의 살아있는 화신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설교자는 교리적, 체험적, 실천적 측면에서 훌륭한 설교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설교자가 그리스도를 전함으로써 회중의 영성이 오히려 쇠퇴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들이 그리스도를 전파함으로써 의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가 그리스도를 전파함으로 인해 그들의 신념이 해이해졌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에 관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삶이 거룩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모든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훌륭한 자질들이, 매일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있는 설교자의 가르침 속에 모두 집약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다른 방식의 설교에서 나타날 수 있는 폐해들은 그러한 설교 곧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설교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2) 오늘 주제로 돌아와서 스펄전이 강조한 교리 설교, 체험 설교, 실천 설교를 해야 하나, 성경의 모든 기록이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면 아무 소용도 없는 일입니다. 

  

 설교자가 증거 하는 이 복음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아무리 교리적인 설교, 체험적인 설교, 실천적인 설교를 잘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튼튼한 기초가 아니라, 모래 위에 집은 집, 사상누각에 불가합니다. 사실이 아닌 것에 기초한 믿음은 아무런 결과도 산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증거 하면서 자신이 거룩한 산, 곧 예수님께서 거룩하신 모습으로 변모되사 장차 다시 오실 재림의 영광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을 보고서, 또한 하늘에서 내려온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 나누는 대화 가운데서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을 모면서 또한 자신이 들어가게 될 하늘 영광의 모습을 본 후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증거 한 것이었습니다.

  

 4. 참된 신앙의 기초는 사도가 직접 보고 들은 체험 곧 역사적 사실만이 참된 신앙의 기초라는 말입니다. 

  

 1) 그런데 1941년 불트만이라는 자유주의 신학자가 성경의 비신화화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성경은 1세기의 세계관으로 기록되었으니 1세기 세계관인 신화적 세계관을 벗겨내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적과 기사는 다 빼고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도, 십자가의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도 하늘로 승천하심도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가 아니어도 부활의 정신을 가지고 사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 사실이 아니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이 실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 중에 그 누구, 그 어떤 사람이라도, 아니 단 한 사람도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동정녀 마리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참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참 하나님이시오 참 사람이 아니시라면, 그리고 신성과 인성을 한 인격에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와 구원자가 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요구하신 율법의 요구에 완전한 순종과 또한 죄인을 대신하여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죄인의 죄에 대한 충분한 보상 곧 충분한 대속을 이루신 것이 아니라면 그 어느 누구도 구원 받을 수 있는 구원의 기초가 성립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시어서 아담이 후손이 아닌, 죄 없이 이 땅에 오신 여자의 후손이 아니시라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아담의 후손이 가지고 태어난 원죄와 자신이 범한 자범죄를 인하여 죽는 것일 뿐이지 대속의 죽음일 수가 없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어 받으신 고난이 아니라면, 택한 백성 모두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실 수 없기에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이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재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저와 여러분이 기대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영생의 소망은 한 여름 밤에 잠시 꾸다가 깰 헛된 꿈이 되고 마는 것이며, 오직 구속함을 받지 못한 모든 죄인들을 위해서는 영원한 지옥 형벌만 예비되어 있을 뿐입니다. 

 2)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과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은 성경의 증거대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사도가 전하는 모든 복음과 그 복음에 합당한 삶을 증거 하는 것은 사도 자신이 친히 보고 듣고 경험한 사실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자존하시고, 자족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어서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신 완전한 순종과 대속의 값을 십자가서 완벽하게 지불하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치르신 충분한 대속의 역사로 구속을 완성하셨고, 이것을 성령님의 역사로 나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사건인 것을 믿는 저와 여러분 모두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하시고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생애와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하심은 모두 목격자들이 있는 역사적 사실이며, 그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5. “예수는 역사다”라는 2017년에 만든 미국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오늘 날에도 정직하게 성경의 진리인가를 탐구하는 사람은 성경이 역사적인 사실을 말하는 책이며, 성경에서 핵심적으로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1980년 시카고 트리분지의 유능하고 이성적인 탐사보도 기자 리 스트로벨의 자전적 이야기인데, 이 사람은 특종을 연이어 터뜨리며 승승장구하던 중에 가족 외식 자리에서 어린 딸이사탕에 목이 걸려 질식할 위기에 처합니다.

 마침 식당에 있던 크리스천 간호사의 신속한 응급처치로 딸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집니다. 그 간호사는 아이의 어머니에게 “원래 다른 식당에 가려다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며 하나님의 인도하심 덕분이라고 말하였고, 이에 깊은 감명을 받은 리 스트로벨의 아내는 교회를 다니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눈에 보이는 증거와 논리로만 판단하던 이 사람은 아내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비이성적인 미신으로 치부하며 부부 사이에는 깊은 불화가 싹이 틉니다. 그는 아내를 설득해 되돌려놓기 위해 자신의 탐사보도 역량을 총동원해 기독교 신앙의 뿌리 자체를 무너뜨리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 전체를 지탱하는 핵심 축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거짓임을 증명해 낸다면 기독교 자체가 와해될 것이라 판단하고 취재에 착수하여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하여 전국의 저명한 석학들을 찾아다니며 집요한 검증을 이어갑니다.

 먼저 의학적 검증을 하였는데,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기절했다가 무덤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냐는 ‘가사설’을 들고 의학 전문가를 찾습니다. 그러나 로마군의 잔혹한 태형, 십자가형의 질식 메커니즘, 창에 찔렸을 때 나온 피와 물 등 의학적 증거 상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확실하게 사망했음을 반박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또한 성경 기록이 수 세기 뒤에 조작된 신화라는 가설을 세우고 고문서를 연구하는 사본학 전문가를 찾아가서 취재하지만, 신약성경 사본은 5,000개가 넘고 원본과의 시간적 간격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등 인류의 그 어떤 고대 역사 문헌보다 압도적으로 짧고 신뢰도가 가장 높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을 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리학적 검증도 하였는데, 성경에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500명이 넘는다고 바울 사도가 증거 하였는데, 이 사람들이 부활한 예수를 목격했다는 기록에 대해서 ‘집단 환각’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수백 명의 사람이 동시에 동일하고 구체적인 환각을 공유하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 검증과 함께 취재하던 경찰관 총격 사건에서 한 용의자를 유죄로 단정하고 특종 기사를 썼으나, 자신의 편견과 확증 편향 때문에 결정적인 무죄 증거를 놓쳐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았음을 나중에 깨닫게 되자, 이 리 스트로벨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결론만 끼워 맞추는 태도”가 얼마나 진실을 왜곡하는지 뼈저리게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수개월간 집요하게 수집한 모든 의학적, 고고학적, 역사적 증거들은 기독교를 무너뜨리기는커녕,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실제 역사적 사건’임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벽면 가득 붙은 조사 자료를 바라보던 리 스트로벨은 마침내 “무신론을 계속 고수하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맹목적인 믿음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적 오만과 편견을 인정한 리 스트로벨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며 아내와 눈물로 화해를 하고 자신의 조사 과정을 책으로 엮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예수는 역사다(The Case for Christ)’를 출간하고, 언론인을 거쳐 목회자이자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게 되었음을 알리며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6.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증거 하면서 오직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기초로 하여 사실만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1)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눈으로 본 것과 귀로 들은 것을 증거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절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8절에서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변모되신 그 산을 “거룩한 산”으로 부르고 있는데, 그 산에서 하늘의 영광을 입으신 거룩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기에 그 산을 거룩한 산이라고 불렀는데, 산 위에서 변모되신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을 친히 눈으로 보았고, 본 것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17절에서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라고 말씀하는데, 베드로 사도가 직접들은 말씀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5절에 보면 오늘 본문에는 생략된 말씀인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은 세례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실 때도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 사도는 부활의 예수님을 친히 눈으로 보았고, 갈릴리 호수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자신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실 때 세 번 모두 내가 주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그 제자였습니다. 

  

 3) 베드로 사도만 보고 들은 역사적 사실을 성경에 기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① 요한 사도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요한일서 1장 1절로 3절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은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그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그 분을 우리가 전하는 것은 우리와 사귐, 그리고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귐을 누리는 자들이 되기를 바래서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로 35절 “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요한을 가리키면서 아들이라고 말씀하셨고, 요한에게는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마리아를 모셨다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 35절의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다는 말은 요한 사도가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께서 찔리심으로 물과 피가 나오는 것을 목격한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2절, 22장 8절에서는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22: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② 바울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로 8절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자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증거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이 받은 모든 계시는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받았다는 것을 갈라디아서 1장 11절로 12절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3)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 사도들에게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고, 또 요한복음 16장 13절에서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약속대로 오순절에 성령님을 이 땅의 교회에 보내주셨고, 이 땅에 임하신 성령께서 사도들을 감동하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것에 비추어 장래 일 곧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일과 천국의 영광에 대하여 증거하고 기록하게 하실 것을 말씀해 주셨는데, 사도들은 성령의 감동 가운데 성경을 기록하였고, 다시 오실 주님과 천국의 영생의 삶에 대해서 들은 대로 본 대로 증거 한 것이 신약성경이라는 말입니다. 

 

 7. 베드로 사도는 기독교 신앙을 가져야 할 이유에 대해서 기독교 신앙이야 말로 세상의 모든 종교와 철학과 윤리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하고 고상한 교훈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1)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저와 여러분은 기독교 신앙이야 말로 가장 고상하고 위대한 교훈인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친히 독생자를 내어 주심으로, 친히 그 아들로 하여금 죄인이요, 원수들의 죄를 담당하게 하심으로 구원하시는 이 구원보다 더 고상하고 위해한 종교와 철학과 윤리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다른 종교에 심취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도 자신들이 믿는 신앙이 가장 고상하고 위대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진리와 윤리와 고상한 것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며, 또한 다른 종교에도 고상한 것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도덕과 윤리로만 본다면 불교와 이슬람이 기독교에 비해서 떨어진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종교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와 기독교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다른 종교의 구원은 다 사람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한 사실이 아닌, 이론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기독교의 경우에는 구원의 기초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으심과 부활은 말씀드린 대로 모두 역사적인 사실이요, 재림 또한 반드시 일어날 일이라고 주님께서 친히 말씀해 주셨고, 천사들이 확정하여 주었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들이 증거 한 대로 우리는 믿고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2) 또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보배로운 믿음에 대하여 가르칠 때, 복음을 따르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근거로 이 약속을 믿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베드로 사도는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 잡는 평범한 어부였는데, 예수님을 믿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성령의 능력으로 설교하는 인생이 뒤바뀐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으면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끊고 가정을 돌보게 되며, 거짓말 장이가 정직한 사람들로 바뀌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전도의 한 방편이 될 수 있으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이외는 다른 종교와 철학에서도 사람을 생각과 삶의 방식을 바꾸는 일들을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오직 베드로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보배로운 믿음과 그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을 증거 하는 증거의 기초는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에서 출발하여 증거 하였습니다. 

  

 8. 참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거나, 또는 갖지 않게 되는 것은 사도가 전한 이 복음의 말씀을 사실로 믿거나 또는 사실로 믿지 않음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죄인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증거 한 대로 우리의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이 땅에 우리를 위한 구주로 오셨고, 우리가 지키지 못한 율법의 요구를 친히 다 이루어주셨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대속을 완성하신 후 부활하셨음을 믿음으로 받은 구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하심 때문입니다. 하늘로 승천하신 후 이 땅에 교회를 위하여 성령님을 선물로 보내주셨고,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께서 택한 백성인 저와 여러분을 복음의 말씀으로 부르시어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게 하시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 보좌 곧 본래 영광 가운데 계셨던 곳으로 승천하신 것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믿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믿지 않아, 예수님의 부활도 믿지 않아, 승천하심도 믿을 수 없어 그러나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신 것을 믿어 그러니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이 다 역사적인 사실인 것을 믿지 않는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초림의 예수님에 관한 모든 성경의 말씀이 역사적인 사실인 것을 믿는 성도만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신 재림도 반드시 일어날 일로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사실을 기록한 이 복음은 역사적인 사실이며, 하나님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행하신 이 구속의 사건만이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조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9. 우리는 사도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 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또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더 알아갈수록 우리는 교리적이 믿음을 갖게 되고, 체험적인 신앙인이 되고, 실천적인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시고 우리를 위해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우리가 듣고 배울 때마다 성령께서 우리의 총명을 밝혀 주시어서 복음의 진리로 무장되는 자들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오직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고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시고, 십자가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이하여 충분한 보상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충분한 대속으로만 구원 얻는 진리는 사랑하고 자랑하고 견고히 붙들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교리적인 신앙입니다. 

  

 2) 또한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낮아지시고 고난 받으시고 대신 저주를 받으신 그 사랑을 생각하고 묵상하고 감사 할 때마다 성령께서 우리의 정서를 새롭게 하시어서 그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그 사랑안에서 살아가는 체험적인 신앙인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저와 여러분이 날마다 나를 위하여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고난 받으시고, 죄인 된 우리를 사랑하사 끝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늘 생각하고 감사할 때 성령께서 그 사랑을 더 깨닫게 하시고 누리게 하심으로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이제 내가 사는 것을 나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분 곧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하시는 체험적인 신앙인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3) 뿐만 아니라, 이렇게 교리적인 신앙, 체험적인 신앙을 가진 성도의 의지를 성령께서 주장하시어 주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목적인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의 삶을 살아가게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집중할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행하는 삶 곧 이 악한 세대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을 살게 하심으로 우리의 착한 행실을 세상 사람들이 보고 우리의 선한 행실을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