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예배 구원에 이른 믿음의 표지(67) "이름이 바꿔진 사람"
창세기 32장 22절로 32절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32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I
1. 오늘도 말씀을 강론하게 하심으로 우리 모두를 먹이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기름 부으심의 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행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연속하여 ‘구원 신앙, 구원을 받은 자의 믿음의 특성, 표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그 믿음의 한 특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구원에 이른 사람, 구원 신앙의 특성, 또는 한 표지를 살펴 본다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흔적’을 살펴 본다는 말도 됩니다.
실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흔적을 우리 안에서 발견하는 일은 매우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자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없는 이들, 예수님 없이는 사는 의미가 없는 자들, 그렇게 믿는 자들에게서 그 믿음(하나님의 구원하신 손의 흔적으로서의 믿음)을 지워낼 자가 하늘에도 없고 이 세상도 없습니다.
마 16:15-17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신 믿음을 누가 빼앗겠습니까?
요 1:12-13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누가, 어느 피조물이 그 이전으로 돌려놓겠습니까?
II
1.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에서 야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 속에서 그 놀라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사를 듣게 됩니다.
특히 이 대목은 정말 절정입니다.
창 32: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우리를 ‘죄의 원리가 지배하는 우리의 본성, 우리의 육체’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시어 ‘그리스도 안으로, 오직 그리스도와 그 의와 그 은혜 안에만 서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사를 오늘 본문을 통하여 배우게 될 것입니다.
2. 야곱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사용되는 적이 흔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듯이 말입니다.
사 40:27-30 “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그러므로 본문에 야곱을 다루신 하나님의 행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III
1. 이 본문의 장면은 야곱이 20년간 외삼촌 집에서 있다가 자기 아버지 집,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있던 일을 보여줍니다.
야곱은 20년간 외삼촌 라반 집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성경을 기반으로 하여 야곱의 나이를 계산해 보면 자기를 죽이려던 에서의 낯을 피하여 외삼촌 집으로 가던 때, 그의 나이는 77세로 보입니다. 야곱이 147세를 살았으니 지금으로 보면 중년의 나이,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에 외삼촌 라반의 집에 피하여 간 셈입니다. 이제 20년이 되어 라반의 집에서 탈출하다시피 나오게 됩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많은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네 아내와 열한 명의 아들과 딸 하나와 양과 소와 가축의 큰 떼를 거느리고 아버지 이삭의집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지금으로 하면 금의환향(금의환양) - 성공하여 자랑스럽게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과 친척들 앞에 서게 되는 – 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큰 난제가 있었으니 형 ‘에서’였습니다. 늙어 눈이 먼 자기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 에서가 받을 복을 대신 받은 야곱에게 있어서 제일 최대의 난제는 에서였습니다.
고향 집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죽었을 가능성을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와 친척들은 야곱을 보면 다 반가워 할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을 다 무색하게 할 수 있는 자가 에서였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 종들을 보내어 에서의 마음을 달래려고 미리 손을 씁니다.
창 32:5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
그러나 그 보낸 자들이 돌아와 야곱에게 보고한 내용은 야곱을 자지러지게 할 정도였습니다.
창 32:6-7 “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7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야곱의 심정은 속에서 타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나름의 꾀를 내 봅니다.
그래서 떼를 둘로 나누라 합니다.
그 이유는? 그의 계산은?
창 32:8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야곱은 자기가 처한 그 곤궁에서 벗어날 꾀를 다 씁니다.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생각해 보며 애를 씁니다. 그러나 힘이 부쳐 그 일의 정답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다려 간구합니다.
창 32:9-12 “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2. 그렇게 기도한 야곱의 마음에 평강이 찾아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마음의 두려움과 답답함은 여전합니다.
기도를 한 다음에 하나님만 의존하는 마음의 평강이 평강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편에서 형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고 여러 떼로 나눠 예물을 준비하라 명합니다.
창 32:13-20 “13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14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15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16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의 종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거리를 두게 하라 하고 17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누구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의 것은 누구의 것이냐 하거든 18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19 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말하고 20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누가 오늘날 우리나라 축산 가격으로 예물을 계산하면 8억 3천만 원 정도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꾀를 써도 에서를 향한 야곱의 마음의 두려움과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상황적으로 볼 때 ‘이번에는 꼭 당하겠구나, 피할 길이 안 보인다’였을 것입니다.
창 32:21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그는 에서로부터 오는 공격에 대비하여 맨 뒤에 자기를 보호할 무리들 틈에 있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차지 않았습니다.
창 32:22-23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이 상황에서 야곱은 알았습니다.
자기의 모든 가족들과 자기의 종들과 부리는 병사들과, 모든 지혜와 자기의 모든 재산에서 아무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고 드디어 그는 그것들로부터 떨어져 있게 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3. 정말 여기 야곱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 모두에게 닥쳐 올 피할 수 없는 인간조건’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고 살면서 늘 ‘우리와 관계된 이들과의 보호막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도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에 그 일반은총이 주어집니다.
야곱도 그러하였습니다.
부모와 외삼촌과, 자기에게 은혜로 주어진 가족들 - 아내들과 아들들과 딸, 자기의 여러 남종들과 여종들, 자기를 지키기 위하여 둘러 있는 사병(私兵)들, 자기가 소유한 모든 가축들과 재산들, -
그러나 자기가 맞서야 할 ‘에서’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이 아무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혼자’ 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께 기도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자기의 현재의 어려움을 제거해 주시고 자기를 보호해 주십사는 극히 인간 수준의 간구였습니다. 그 기도를 하고도 그의 마음은 기도하기 전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홀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정황에 처한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 ‘홀로 떨어진 것’ 아니라 그에게 그런 정황이 닥쳐왔습니다. 그런 조건이 주어졌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삶의 행복의 조건을 ‘나의 가족들과 사람들과 피조물들’ 속에서 찾으려 합니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하나님의 복 주심을 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신 그 모든 좋은 것들을 제게서 거두어가지 마소서. 그들이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보호자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계속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러니 야곱이 앞에서 드린 기도는 ‘하나님 자신’을 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나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 자체’로 삼는 그런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저나 여러분은 스스로 항상 물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기도를 하고 있는 데, 내가 구하는 것이 하나님 자신인가? 하나님이 나의 영원한 거처이심을 알고 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지금 나의 현재 필요한 것을 따라 복 주시기를 구하는가?”
그런 것도 필요하여 구하기는 하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 구하는 것 보다 더 나을 것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 6:31-33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야곱의 기도는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의 수준이었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지금 자기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셨는지 아닌지 아무 기별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삶의 수준이 늘 이러합니다.
우리가 본성을 따르면 늘 그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본성을 따라 그런 수준은 결국 ‘나는 혼자구나’라는 결론에 이르고, 거기서 사람들은 나름으로 자기 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고, 자기를 지탱할 아무 것도 없어 슬픈 존재가 됩니다.
야곱이 꼭 그런 수준이었습니다.
그의 가족들, 그를 지킬 병사들, 그의 종들, 그 엄청난 재산과 가축들 – 그 모든 것이 정말 아무 힘도 없는 상황에 처한 야곱입니다. 야곱이 꾀가 많으나, 그의 꾀가 바닥이 났습니다. (He was at his wit’s end)
창 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방식으로 그런 것이 오든지 간에 모든 이들- 우리 모두 각 자에게 ‘나는 홀로’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때를 맞게 됩니다.
4. 그런데 바로 ‘나는 홀로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때, 어떤 행로가 이어지는가? - 그것이 문제입니다.
거의 모든 이들이 ‘나는 홀로’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때, 그 다음의 행로는 대개 어떠한가? 자포자기, 아니면 허무감과 덧없음의 슬픈 노래를 부르다가 힘없이 아무 기맥이 없이 지나다가 생명이 불이 꺼집니다. - 그것이 거의 모든 이들의 결말입니다.
그러나 여기를 주목하십시오.
‘홀로 남은 야곱에게 어떤 한 사람이 찾아옵니다.’
창 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찾아온 사람이 ‘홀로 남은 야곱을 가만히 놔두지 않고 대항하여 씨름을 걸었습니다.’
인간적인 말로 ‘그 사람이 홀로 슬퍼하고 있는 야곱에게 달려들어 씨름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야곱과 그 사람 사이에 씨름이 벌어졌습니다.’
이제 야곱은 혼자가 아니라 ‘그 사람과의 씨름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야곱이 풀어야 할 큰 숙제는 ‘에서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과의 씨름에서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씨름이 금방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그 밤 몇 시에 찾아와 씨름을 시작하였는지는 정확하게는 모르겠으나, 그 밤이 새도록 그 씨름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창 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우리는 여기서 물어야 합니다. 여기서 씨름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씨름이었을까요?
우리 식으로 삿바 싸움이었겠습니까?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서로 겨루었겠는가?
본문을 보면 ‘외관적으로는 그리 보입니다.’
야곱이 ‘그 사람’에게 지지 않고 계속 대항하였습니다. ‘그 사람도 그에게 지지 않으려고 계속 대항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기기 위하여 특단의 방법을 씁니다.
창 32: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 싸움은 이제 끝난 것입니다. 씨름하는 사람이 다리에 힘이 풀리면, 더 이상 씨름은 진행되지 않습니다. 야곱이 자기 허벅지 관절, 대퇴부의 뼈가 빠지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그는 평생 다리를 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야곱이 ‘그 사람’과 그렇게 밤새 씨름하면서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는 아픔을 겪었어도 ‘그 사람’을 놓아 주지 않고 이상한 요청을 합니다.
창 32: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야곱은 ‘그 사람’과의 씨름을 통하여 심경에 놀라운 변화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초저녁까지 야곱은 ‘에서만 아니면 살 것 같다’는 식에 빠져 있었는데, 이제는 ‘당신이 바로 나에게 복을 주시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제 야곱이 이 씨름을 통하여 그 내면의 원리가 달라졌습니다.
‘에서만 나는 정말 괜찮은 인생이네’ 하였던 그가 ‘밤새 자기를 대항하여 씨름한 그 사람에게 전심으로, 자기 존재 전체를 걸고 복을 구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 그것도 주면 받고 아니면 말지가 아니라 – 전심으로 자기 존재 전체를 드려, 자기의 환도뼈, 자기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서 아프고 힘이 없을 터인데도 거기에 마음을 쓰지 않고 오직 ‘이 사람에게 복을 받지 않으면 내 인생 아무 것도 아니다’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그에게 ‘형 에서’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야곱에게는 ‘이 사람에게 복을 받느냐 아니냐가 그 존재 전체가 걸린 최대의 문제’로 바뀌었습니다.
창 32: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오직 이 사람에게 복을 받지 않으면 내 인생이 헛되다, 내 존재 전체가 바로 이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야곱이 고백한 셈입니다.
이제 정말 야곱을 짓눌러 답답하고 공포 스럽게 했던 에서가 야곱의 전체를 사로잡았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홀로 있는 자기’를 찾아와 씨름하자 덤비고 밤새 씨름 하다가 자기 허벅지 관절을 친 이 사람에게 ‘자기 전체’를 걸기로 한 것입니다.
그 야곱의 고백을 들은 ‘그 사람이’ 야곱에게 말합니다.
창 32:27-28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너는 이제 하나님도 이기고 사람도 이긴 자가 되었도다. 그래서 네 이름이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로다.”
IV
1.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 본문은 ‘상징과 비유와 모형으로 된 하나님의 특별 계시’였습니다.
실제 있었던 일인데 그 사실 자체의 외적인 의미가 아니라 숨어 있는 영적 은혜 – 곧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사를 ‘상징으로’ 보여주시는 계시였습니다.
우리도 홀로 내처 내버려 두셨으면 그렇게 살다가 슬픔 중에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의 구덩이로 떨어졌을 터인데.
야곱에게 찾아온 ‘그 한 사람’으로 상징된 분이 찾아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 ‘이름을바꾸시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그 당사자의 ‘속성과 성품과 특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하나님꼐서 ‘이름을 바꾸셨다’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어 ‘본성의 사람(야곱)이 아니라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구원받은 사람은 여기 야곱의 일을 통하여 계시된 일, ‘영적인 일’이 일어난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모든 이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꾼 일이 우리 믿는 모든 이들에게 일어났습니다.
2. 여기 ‘홀로 떨어진 야곱’에게 온 사람은 대체 누구입니까?
존 칼빈을 비롯한 모든 개혁주의적 성경해석자들은 한 결 같이 ‘성육신 하시기 전에 사람으로 나타나신 신현(神顯, Theophany)의 성자 하나님 그리스도셨다’는 것입니다.
홀로 떨어져 ‘자기 존재의 의미도 상실하고 아무 그 허무와 질고에 곤궁에 떨어져 있던 야곱’에게 ‘사람의 모양으로 오시어 밤새 씨름을 건 사람’이 그리스도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죄 중에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에도 그것도 모르고 천연덕스럽게 살아가던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의미를 찾아 애타고 어찌할 바 몰라 방황하게 하시고, 그 홀로되었다는 고독 의식으로 몸부림 치게 만드시고(이것을 가리켜 청교도들은 회심하게 하시려고 준비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보았다), 그런 중에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찾아 오시어 “복음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당신을 믿게 하신 이”가 바로 야곱을 그 밤에 찾아 오신 그분이십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정말 우리 자신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깨우치고 분발하고 각성하여 먼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요청하며 ‘나에게 복을 주시니 않으면 가시게 하지 못하겠다고 전인적으로 매달릴 자’가 누구입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 본성의 수준으로는 우리도 다 ‘홀로 떨어져 있다고 혼자 외롭게 죽어 심판에 처할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부터 사랑하셨습니다.
엡 2:1-7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3. ‘씨름 하였다’는 것은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과 우리 본성 사이의 겨루기를 상징합니다. 우리 본성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손합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대항하십니다.
처음에 복음을 들었을 때 누구든지 금방 자기의 본성으로 ‘예, 믿겠습니다’ 할 자가 없습니다. 우리의 본성으로는 결코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성과 예수님과 항상 대적입니다. 예수님 믿게 하시어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 옛 사람의 본성, 육체의 본성은 ‘예수님과 대항하여 늘 씨름’합니다. 우리 본성으로는 ‘늘 하나님을 대항하여 겨룹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옛 사람 죄악의 본성이 우리 안에 남아 있어도 ‘새생명의 원리, 영생의 원리’ -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어 ‘오직 그리스도 주만 우리의 영원한 거처요, 우리 복락의 샘이라’고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사람과만 씨름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리스도 밖에 있습니다.
우리 구원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씨름한 끝에 찾아오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의 방식’을 찬미합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 그리스도와 그 죽으심과 부활로 이루심 속에 나 자신을 넣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이 구속주, 나의 주 하나님이셨네요. 오직 내가 당신 안에서만 나의 존재와 나의 복이 있나이다. 당신이 날 버리시면 나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로소이다.’라고 고백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고백하게 하신 분이 성삼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도처럼 말하게 되었습니다.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4. 실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은 ‘야곱, 본성의 이름’ 말고 ‘이스라엘’의 새 이름을 가진 자들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그 존재의 특성과 성품과 속성’을 나타내는 표시였습니다.
이제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와 씨름하다가, 결국 오 주여 당신의 나의 주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그 내면이 바뀐 사람 –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5.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신 ‘그 사람의 일’은 무엇인가?
그는 평생 절었습니다.
그것은 그를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일을 기억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자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본성적으로 교만하게 의지하던 것을 쳐서 상처가 나게 하시어’ 더 이상 그것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저나 여러분 모두에게도 ‘하나님이 치시어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하신 흔적’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우리 각자에게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흔적은 우리로 하여금 교만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늘 감사하게 하는 ‘영적인 사자’입니다.
그것을 인하여 우리가 괴로워하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평생 ‘몸에 가시’가 그것이었습니다.
고후 12:7-9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야곱이 허벅지 관절이 위골되었는데도 오직 그의 존재 전체를 ‘그 사람 –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은혜외 복 주심’에 걸었습니다. - 야곱이 구원 신앙인으로 서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식구들이 다 이상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우리 남편, 우리 아버지에게 하나님과 무슨 일이 있었구나)하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영생의 복을 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시 73:22-26 “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우리 야곱으로 살지 말고, ‘새 이름 이스라엘 답게 삽시다.’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 – ‘본성의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스라엘’이 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원수된 하나님과 화목하여 하나님을 이겨낸 사람 – 상징적으로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 자처럼, 우리에게 빚을 진 자가 같이 은혜를 영원히 주십니다. -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하여 하나님을 자기 편으로 뜰어 들인 이긴 자들입니다. - 하나님의 영원한 보장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긴 자들입니다.
요일 5:4-5 “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6. 야곱은 이제 ‘그 마음의 생각과 원리가 근본적으로 바뀐 사람,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옷입은 사람 – 이름이 바뀐 사람’으로 견고하게 서서, 에서를 맞을 차비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과 존재의 의미와 삶의 행보’가 ‘야곱 – 발굽치를 잡은 육체의 꾀와 악독으로 나아가는 사람’ 아니고,
이제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상속자 자녀로 서게 된’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우리의 순례길을 가게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 보혜사로 주장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