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AT JOONGSIM

강의안

말씀을 배우고 삶으로 나누는 자료입니다.

주일 낮예배 베드로후서 강론(4) "이런 것이 있는 삶과 없는 삶"

베드로후서 1장 8절로 9절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1. 지난 시간에 베드로후서 1장 5절로 7절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값없이 은혜로 주신 보배로운 믿음 위에 더해야 할 7가지 선한 행실의 덕목들을 살펴보았습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심을 받은 자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성도가 아니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어떤 일을 행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 생명의 교통을 할 수 있는 새 생명을 받은 자가 아니라면, 곧 영적으로 여전히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자라면, 그들에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을 더하라, 이와 같은 것들을 공급하라고 말하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 일어나서 음식을 먹고 힘을 내어서 열심히 일을 하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는 쓸모없는 말이요, 실현 불가능한 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나기 이전 곧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기 이전에는 죄의 지배를 받음으로 총명이 어두워지고 양심은 둔해졌고 의지도 선한 일을 행할 수 없는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총명이 어두워짐으로 로마서 12장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분명할 수 없는 어두워진 지성이 되었습니다. 또한 어렴풋이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기뻐하시는 선하신 뜻을 안다 하여도 그 선한 것을 타락한 인간의 정서는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범죄 하기 이전의 아담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요 즐거움이요, 그것이 삶의 이유이고 목적인 존재였습니다. 아담에게 살게 하신 곳을 ‘에덴’이라 부르셨는데, 에덴이라는 말의 뜻이 ‘기쁨’인데, 왜 에덴이 기쁨의 장소였습니까?

그곳이 기쁨의 장소인 것은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범죄 하기 이전의 아담에게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기를 원하는 뜨거운 열망, 곧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열망이 항상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하신다 하여도 범죄 이전의 아담은 그 모든 일을 정서적으로 즐거워하며, 의지를 다하여 행하는 자였습니다.

마치 목마른 사람이 생수를 보고 반가워하듯, 배고픈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차려진 식탁을 보고 기뻐하듯, 추운 겨울에 따뜻한 난롯가에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옮겨지듯이 범죄 하기 이전에 아담의 정서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기뻐하고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자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범죄하고 타락한 이후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안다하여도 타락한 사람의 정서는 그것을 기뻐하지 않고, 본성이 원하는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의지도 타락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지 않고, 정서가 좋아하는 것을 행할 뿐인데,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의 정서는 타락한 본성이 원하는 것을 사랑하는 정서가 되었고, 의지는 정서가 원하는 것 곧 타락한 본성이 원하는 죄의 즐거움을 따라서 선이 아닌 악과 죄를 행하는 악한 정서에 굴복하는 의지가 되었을 뿐입니다.

2)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기한 능력 곧 신적인 능력과 권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은 자들은 다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기한 능력 곧 신적인 능력과 권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보배 피로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심을 받은 자들은 구원받기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자들입니다.

① 죄의 지배를 받던 어두워진 총명이 밝아졌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 본 믿음에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을 더하는 삶을 살라고 하신 말씀들은 타락한 본성을 따라서 이 세상에서 육체의 정욕, 안목이 정욕,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 보기에 어리석은 일들로만 보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자가 되었고, 그런 삶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영광스럽고 복되다는 것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총명이 새로워져서 말씀대로 순종하라고 하신 것이 구원받은 자신에게 너무나 합당한 말씀으로 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② 또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거듭난 성도들은 의지와 정서도 새롭게 된 자들입니다.

이제 거듭난 성도의 정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뜻을 기뻐하는 정서가 되었고, 새롭게 된 의지는 정서가 기뻐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는 의지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은 자들에게 승리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는 총명을 주시고, 양심을 새롭게 하시고, 의지와 정서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거듭난 성도가 이 땅에서는 완전한 성화를 이룰 수 없으나, 새롭게 된 지성과 정서와 의지를 가지고 성화를 이루는 삶인 믿음에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을 더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보배로운 믿음에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을 더하라고 하신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에게 주신 구원하는 믿음에서 맺히는 열매를 맺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3) 오늘 살펴보려는 베드로후서 1장 8절로 9절에서는 앞 시간에 살펴 본 ‘믿음에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을 더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먼저 8절에서는 믿음에 더하라고 하신 7가지 선한 행실을 이루어갈 때 얻게 되는 유익을 말씀해 주시고 있고, 9절에서는 구원받은 성도가 연약하여 이런 열매가 맺히지 않을 때의 부정적인 모습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2. 먼저 오늘 본문 8절에서는 믿음에 더해야 하는 7가지 선한 행실을 추구함으로 얻게 되는 유익 중에서 이런 성도들에게 이런 열매가 맺힐 때 “흡족”하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1) 먼저 “이런 것”은 무엇입니까?

지난 시간에 살펴 본 보배로운 믿음 위에 더해야 하는 7가지 선한 행실입니다.

믿음에 더해야 첫 번째 선한 행실이 덕이었는데, 덕은 하나님의 존재와 구원의 영광을 성도가 말과 행실로서 비추는 영적, 도덕적 탁월함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덕에 지식을 더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영적이고 체험적인 지식 곧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지식 위에 절제와 인내를 더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구원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은혜를 누리나 아직 완전히 성화되지 못하였기에, 내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욕망과 본성의 원리를 절제하고, 또한 외부로부터 오는 어려움들에게 대해서 오래 참는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절제와 인내 위에 경건을 더하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절제와 인내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와 목적은 경건을 위해서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경건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과 예배’가 경건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경건 위에 형제 우애와 사랑을 더하라고 하셨는데, 형제 우애는 믿는 형제들 곧 당시 핍박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사랑으로 돌아보는 것이요,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죄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김으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2) 이렇게 보배로운 믿음 위에 7가지 선한 행실이 더해지는 삶을 살아간다면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이라고 하십니다.

여기 “흡족하다”는 말은 우리말로는 ‘넉넉하여 마음에 차다’라는 뜻이나,

헬라어로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이라는 말은 현재 능동태 분사형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 능동태 분사라는 말은 현재 그들이 주도적으로 가지고 있고, 행하고 있는 현재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① “너희에게 있어”라는 말은 헬라어로 ‘휘파르콘타’인데, 현재 능동태 분사로서 성도들이 ‘이와 같은(믿음 위에 더하는 7가지 선한 행실)이 이미 본질적인 속성으로 내면에 실재하여 자리를 잡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거듭난 자들에게 이와 같은 새 생명을 심령에 심어 주셨고, 부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② “흡족한즉”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플레오나존타’로서 ‘증가하다. 자라다’라는 뜻을 가진 ‘플레오나조’의 현재 능동태 분사형으로서 현재에도 ‘계속해서 넘쳐흐르다, 계속해서 증가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이 너희에 있어 흡족한즉”이라는 말씀은 보배로운 믿음을 은혜로 받아 거듭난 성도들은 믿음 위에 더해야 하는 7가지 선한 행실들을 본질적 속성으로 항상 가지고 있는데, 이 7가지 선한 행실들이 현재적으로 항상 자라고 있고, 증가하여 넘쳐흐르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그 믿음 위에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을 공급하고 더하는 삶은, 일정 수준까지 자라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력으로 인해서 끊임없이 불어나며 넘쳐흐르는 상태여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심령 속에도 이런 은혜를 넘치도록 부어 주시어서 영적인 생명력과 영적인 성장이 날마다 증가하고 넘쳐남으로 날마다 우리 성화의 목표인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3. 또한 오늘 본문 8절에서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있어 흡족할 때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게 된다고 하십니다.

1) 여기 “그리스도를 알기에”라는 말의 원어적인 뜻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고 할 때, ‘지식’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피그노시스(ἐπίγνωσις)’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헬라어로 사람의 지성과 논리로 아는 지식을 말할 때 사용하는 ‘그노시스(γνωσις)’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여기서는 ‘에피그노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에피’라는 말은 ‘∼을 향하여, ∼의 가까이, ∼에 바짝 붙어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와 친밀한 교제 속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알기에”로 번역한 것은 잘된 번역입니다.

2) 또한 “게으르지 않고”라는 말씀은 ‘아르고스’라는 단어인데, 부정 접두어인 ‘아니’라는 뜻의 헬라어 ‘아(α)’와 ‘일, 행위’를 뜻하는 ‘에르곤(ἔργον)’의 합성어로서 ‘일하지 않는, 활동하지 않는, 무기력한’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있어서 ‘항상 활동적이고, 무기력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머리에만 머무는 지식이 아니라, 활동하는 지식, 날마다 그리스도를 더 알아가는 지식을 말하는데, 참된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게으름이나 무력함에 빠지지 않는 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때로 잠시 연약하여 영적인 침체의 자리로 나갈 수 있으나, 그런 기간은 계속되지 않고, 주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 다시 일어나 그리스도를 더 알가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그리스도를 알 때 봄눈 녹듯이 해결되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가지신 존재의 영광,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대속의 사랑, 그 대속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고 사망권세를 다 이기시고 다시 사신 부활의 영광,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나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구원의 영광, 그 구원의 영광 속에 포함되어 있는 영원한 천국의 영광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과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구원과 상급을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저와 여러분은 영혼에 힘을 얻고, 더욱 강건한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어 더욱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3) 베드로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고 하는 것을 본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의 주제가 마지막 구절인 3장 18절에서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것이라고 여러번 말씀을 드렸는데,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는 이 땅에서나 장차 들어가게 될 천국에서나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영생의 삶을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2장 1절로 2절에서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삶 이 땅에서 가장 귀한 삶이요, 모든 어려움과 문제를 넉넉히 이기고 승리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의 이 땅에서의 삶의 목적과 이유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힘쓰는데 있기를 소원합니다.

4. 뿐만 아니라, 이런 삶을 살아갈 때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4절로 6절에서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도가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을 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당연히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라고 주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하신 말씀과 같은 내용을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마태복음 7장 16절, 20절, 33절에서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33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무는 그 맺히는 열매로 무슨 나무인지, 살이 있는 나무인지 죽은 나무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1) 보배로운 믿음 위에 더해야 하는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이라는 7가지 선한 행실들이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맺혀야 하는 열매들입니다.

이 열매들을 통하여 그 성도가 참된 그리스도인 곧 구원받아 날마다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자인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십니다. 서두에 말씀을 드린 대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이런 열매를 맺기 위해서 힘쓰고 애를 써도 흉내만 낼뿐, 힘만 들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기한 능력 곧 신적인 능력과 권능으로 말미암아 보배로운 믿음을 통하여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은 구원 받은 성도만이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2) 또한 이 보배로운 믿음에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을 더하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인들이 맺어야 할 열매이지만, 또한 이런 열매를 통하여 다른 열매도 맺게 됩니다.

믿음 위에 7가지 덕목이 더하져 갈 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단순한 자랑거리가 아니라, 그 선한 행실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구체적인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의 모습을 보고,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위로와 힘을 얻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행실을 통하여 예수님께 나아오게 하는 구원의 통로 곧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연결하는 구원의 다리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의 이런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히는 모습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날 주님께 돌아와 구원을 얻게 하시는 통로가 된다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5. 오늘 본문 9절에서는 이런 열매가 보배로운 믿음 위에서 맺히지 않을 때의 부정적인 모습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그 첫째가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대부분이 시력이 떨어짐으로 안경을 쓰거나 안과 수술을 하는데, 육체의 눈이 어두워지는 것 보다, 성도들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는 것을 더 경계해야 합니다.

1) 영적인 시력이 어두워지면 멀리 있는 것을 볼 수 없다고 하시는데, 이 말은 바로 눈앞의 것만 본다는 말입니다.

보배로운 믿음 위에 더해야 하는 7가지 선한 은혜의 열매들이 맺히지 않는 자들은 영적인 지각이 없기에 땅의 것만 추구하며 살게 된다는 말인데, 성도가 영적인 시력이 나빠져서 멀리 보지 못하고 가까운 곳만 보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되면 현실의 문제 곧 이 땅에 속한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 위에 7가지 선한 행실을 더해가는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지금 이 땅에서만 인생의 의미를 찾고, 오직 이 땅에서의 성공과 출세와 즐거움만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자가 됩니다.

영적으로 멀리 보지 못하고 가까이 이 있는 이 세상만 바라보고 사는 삶은 베드로 사도가 베드로 전서에서 합당하지 않다고 가르쳤던 삶 곧 ‘하나님께서 주신 참 자유는 악을 가리는데 사용하며, 악을 악으로 갚고 욕을 욕으로 갚는 삶을 살게 되며, 구원 받기 이전의 삶인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을 추구하던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2) 영적인 시력이 어두워지면 가까이 있는 세상만 보고 멀리 있는 천국과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의 날을 바라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멀리 보지 못하는 사람은 베드로 사도가 베드로전서에서 강조했던 ‘하늘 본향을 향하여 가는 나그네의 삶 곧 섞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의 유업’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삶으로서,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천국의 기쁨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다가올 최후의 심판 자리에서 죄인에게 부어질 영원한 형벌의 심판과 또한 믿는 자들에게 주실 영원한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영원한 천국과 지옥의 형벌이 보이지 않으니, 더욱 세상 중심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베드로 사도가 경고하고 있는 거짓 선지자 거짓 선생들이 추구하는 ‘자기를 사신 주를 부인하고, 호색하는 것을 따르며, 탐심으로 지어낸 말을 하고 성도들로 이득을 삼는 심판 받을 자들의 삶’입니다.

6. 또한 오늘 본문 9절 하반 절에서 보배로운 믿음 위에서 7가지 선한 행실의 열매가 맺히지 않을 때의 부정적인 두 번째 모습은 “그의 옛 죄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 여기서 “옛 죄(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죄악 된 옛 사람의 삶에서 벗어난 자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옛 죄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과거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구원의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가 요구하는 합당한 삶을 살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9절 상반 절에서 말씀한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한다고 하신 그 삶 곧 영적인 시력이 약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고, 장차 들어가게 될 천국의 영광을 생각하지 바라보지 않고, 이 세상에 속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그의 옛 죄 깨끗하게 된 것을 잊”어버린 삶이라는 말입니다.

2) 오직 은혜로 보배로운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옛 죄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어 버린 삶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옛 죄 깨끗하게 된 것을” 항상 기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삶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은 칭의의 구원의 자리에서 7가지 선한 행실의 열매는 맺는 성화의 자리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성화 없이 칭의 만 주장하는 것은 정상적인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화의 행위가 칭의의 공로가 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대속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으셨기에, 그 피로 죄에서 깨끗함을 받은 성도는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은혜로 “옛 죄 깨끗하게 된 것을” 기억하는 성도는 보배로운 믿음 위에 날마다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을 더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3) 베드로 사도는 지금 이 말씀을 네로의 핍박이 시작된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던 성도들에게 주셨습니다.

네로 황제의 핍박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런 잘 못이 없이 그저 예수님을 믿는 소수의 힘이없는 자들이라는 이유로 로마에서 일어난 화재의 화풀이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시대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때에 베드로 사도는 성도인 것을 들키지 말아라, 숨어 살아라, 도망가서 환란을 피하라는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아무리 고난과 핍박이고통스럽다 하여도, 보배로운 믿음을 선물로 받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들은 자신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서 구속함을 받은 자인 것을 기억하고, 그 구원에 걸 맞는 선한 행실의 삶을 살아야 한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그렇게 할 때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자식 안에서 자라나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수 있다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은혜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는 영적인 시력이 약하여 멀리 보지 못하고, 눈앞에 세상만 추구하며 살수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핍박을 면하고, 세상적으로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 것이 목적이 되거나, 또 옛 죄 깨끗하게 하심을 잊고,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시어서 믿음에 더하라고 하신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이 날마다 더해지고 자라감으로 이런 것이 없어서 멀리 보지 못하는 영적인 시력이 나빠서 옛 죄 깨끗하게 하심을 잊어버린, 죄 가운데 행하는 자들이 아니라, 이런 것이 흡족하여 곧 계속해서 흘러넘치는 은혜를 주시어서 더욱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남으로 현실의 어떤 환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많이 맺게 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