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예배 베드로후서 강론(3)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베드로전서 1장 5절로 7절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1. 지난 시간에 베드로후서 1장 3절로 4절 말씀을 통하여 2가지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1) 첫째는 3절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기한 능력” 곧 신적인 능력과 권능으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것은 이 세상에 속한 물질과 명예와 권세를 얻을 수 있는 재능이나 능력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그 능력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는 것은 아담의 범죄로 그의 후손들이 잃어버린 상태로 출생하는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를 회복하는 것이며, 이 교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건한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기에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기한 능력 곧 신적인 능력과 권능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방편이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서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고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영광과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영광스런 일인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신 완전한 순종과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곧 충분한 대속의 영광을 깨달아 알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2) 4절에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주셨는데, 그 약속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을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표현하였고, 4절의 말씀에서는 그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에게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도 주셨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땅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라고 말하면 ‘신분이 높아지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명예로운 사람이 되고, 많은 재물을 소유하는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2가지로 말씀하는데, 첫째는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정욕을 따라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이루는 삶, 곧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한 삶을 살아간다 하여도 성령으로 감동을 받은 베드로 사도는 그것이 썩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원하고 뜻한 모든 것을 다 이룬 성공한 삶을 산다 하여도 그것을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와 같이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섬광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은 바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성한 성품” 곧 ‘신성적인 성품’여 참여한다고 하여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 중에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공유적 속성 중에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고, 이것이 가장 큰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영원한 세상이 아니라, 반드시 끝이 있는 유한한 곳입니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더 유한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라고 말씀하였고,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짧은 시간이 지나면 모든 인생이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데, 세상에 속한 물질과 명예와 권세와 쾌락을 추구하며 살던 자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따라서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살아간 성도들 곧 저와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서 범죄한 인생의 비참함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였는데, 인간이 범죄로 잃어버린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자녀들에게는 “신성한 성품” 곧 하나님을 닮은 자들이 되게 하신다는 ‘보배롭고도 가장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실 때에는 점도 흠도 주름 잡힌 것이 없이 완전한 모습으로 서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복과 은혜를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믿음도 “보배로운 믿음”이며, 이 믿음을 따라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라는 말씀입니다.
3) 오늘 말씀은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아서, 하나님을 닮아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덧입는 성도가 더욱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2. 오늘 본문 5절의 시작은 “그러므로”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1) 여기 “그러므로”라는 말은 연결 접속사로서 1절로 4절에 ‘비추어서’, 또는 1절로 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① 이 말씀은 성도들이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으니, 하나님을 닮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서 나타내야 마땅한 성도의 삶의 모습이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영적인 논리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② 만일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 위에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을 더하는 삶을 살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기독교의 구원관이 아닙니다.
이런 선한 일을 행해야 ‘구원을 받고,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으라는 말의 다른 표현에 불과한 이단적인 가르침입니다.
참된 기독교는 이와 반대입니다. 3절에서 그리스도의 신기한 능력 곧 신적인 능력과 권능으로 거듭나게 하사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심으로 4절에 말씀하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할수 있는 자로 만들어 주셨으니, 그에 걸맞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2) 이 원리는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기준과 원리인 십계명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십계명을 주신 이유도 십계명을 잘 지킴으로 의로운 자가 되어 구원을 받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부터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받은 백성들의 삶의 모습이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그 백성의 삶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면서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서문에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참된 복음의 말씀은 우리에게 뭔가를 행함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그 후에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1장 33절로 36절에서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여기 33절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판단하고 헤아릴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34절에서 주의 마음을 알고, 주의 모사가 될 사람도 없다고 하십니다. 35절에서는 주께 먼저 드려 하나님을 감동시킴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돌려 받을 사람도 없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36절에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어머니의 태로부터 출생할 때부터 영적으로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서 출생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데 있어, 불가능한 전적으로 부패한 선을 행하기에 무능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듭나지 않은 자에게 무엇을 행하라고 먼저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성경이 성도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한다. 어떤 삶을 살기에 힘을 써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미 영적으로 죽은 자리에서 생명을 얻었고,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3)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2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로는 내가 노력해서 구원을 이룰 수 있고, 나의 행위와 의로움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인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나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받고, 구원을 받으며, 나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는 이와 반대로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니 하나님 앞에서 내가 행할 일은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선한 행위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구원에 이르겠다는 것도 잘못이고, 오직 은혜로 완전한 구원을 받으니 구원 받은 이후에도 우리가 할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잘 못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무언가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알미니안의 교훈이고, 로마교의 교훈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끝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성경의 복음 진리와 다른 복음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베드로후서 1장 5절로 7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하심을 받았고, 그 구원의 내용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신 것인데,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생명활동입니다. 그 생명 활동은 경건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경건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하나님은 온전히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받았으니, 생명의 특징인 성장을 해야 하는데, 그 성장은 구원이 조건이 아니라, 생명 얻은 자의 자연스런 반응이라는 말입니다.
4) 베드로후서의 기록 목적이 밖으로부터 오는 핍박과 안에서 시작된 이단의 악한 미혹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신 보배로운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말씀을 드린바 있습니다.
베드로후서의 전체 결론인 3장 18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는 것 곧 성장, 성화가 대주제인데, 성도가 이 땅에서 핍박과 이단의 악한 교훈을 이기는 것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어려움 곧 때때로 찾아오는 건강의 문제, 물질의 문제, 사람과의 불화의 문제, 부모님과 자녀들의 문제 등등 수많은 어려움을 능히 이기고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 날 때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5) 성도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야 하는 것은 성도들이 취사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① 로마서 8장 28절로 29절에서는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 28절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우리가 생각할 때 좋은 일이나 어려운 일, 또한 우리가 행하는 의로운 일과 때로 넘어짐으로 범죄하게 되는 모든 일을 포함하는 모든 일입니다.
29절에서는 그 모든 일이 결국 합력하여 이루게 하시는 선한 일이 “그 아들의 형상(곧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창세전에 저와 여러분을 택하셨고, 복음으로 부르셨고, 성령으로 역사하사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십자가의 대속의 복음이 나를 위한 것임을 믿게 하심으로 구원하셨고,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28절에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볼 때 좋은 일과 힘들고 어려운 일 뿐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의로운 일과 때로 넘어져서 허우적대는 죄에 굴복하는 모든 일까지 결국 합력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넘어지는 일 곧 때때로 죄에 떨어지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 받는 일, 곧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일이 되게 하심입니까? 성도가 넘어질 때 하나님은 자녀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징계하십니다. 성도는 넘어지고 죄를 지을 때 마음이 평안한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은 일을 행할 때 징계하심으로 평강이 깨어집니다. 이 때 은혜에 합당치 못한 자신을 바라보고 분하게 여기며, 회개하고 다시금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로 나아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경건한 길로 다시 나아가기 때문에 때로 연약하여 넘어지는 일까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 영적 성장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② 구원받은 성도가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것을 에베소서 2장 8절로 10절에서도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바대로 여기 10절에서 말씀하시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에서 “선한 일”은 구약의 ‘토브’ 곧 하나님께서 행하신 창조와 재창조가 선한 일이었습니다. 재창조에 속한 출애굽과 그 백성에서 율법을 주신 일, 그리고 그 백성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실 때 사용된 단어가 “토브” 곧 선한 일인 것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신약에서 “선한 일”에서 ‘선하다’는 말은 ‘아가토스’인데, 성경에서 선한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선한 일은 선하신 하나님을 닮을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로 구원하신 목적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하시고 있습니다.
3. 오늘 본문 5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더욱 힘써”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 “더욱 힘써”라는 말씀은 헬라어로 ‘스프덴’이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부지런함, 열심으로’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성도가 어떻게 해야 이미 은혜로,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로서 그 믿음 위에서 ‘부지런함과 열심히’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와 사랑을 공급’할 수 있습니까?
1) 먼저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이 뜻에 합할 때에 ‘보배로운 믿음 위에 부지런함과 열심’을 더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중심에 그리스도로 구원받았다는 분명한 이해와 감사와 감격이 충만한 상태가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 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합해야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하게 기쁨으로 선을 행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 마음이 합한 자였습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로 23절에서 “22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다윗의 중심이 하나님께 합할 때 하나님은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룰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하나님의 뜻은 다윗의 후손으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택한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었습니다.
오늘 은혜로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의 마음의 중심이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뜻에 합할 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용하여 주시어서 더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하시고, 하나님을 닮은 성도로서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복음이 증거되는 일에 사용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의 뜻에 합하기 위해서 우리가 행하여야 할 일은 진리위에 굳게 서야하고, 진리위에 굳게 설 때 주시는 은혜로만 하나님의 뜻에 그 중심이 합한 자가 되어 “더욱 힘써” 곧 ‘부지런함으로, 열심히’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와 사랑을 공급’할 수 있습니다.
2) 그래서 우리는 “더욱 힘써” 곧 ‘부지런함으로, 열심히’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와 사랑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진리 위에 서’야 하겠습니다.
진리는 참이신 성삼위 하나님이 진리이시고, 그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인 성경이 진리입니다. 그 성경의 교훈을 증거하는 십자가의 구원의 복음만이 진리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에 견고히 서야합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이 진리만이 거듭난 성도의 심령을 은혜로 주장할 수 있습니다.
참된 진리, 곧 진리 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히 알아갈 때 그 진리가 성도로 하여금 ‘부지런함으로, 열심히’ 믿음 위에 ‘덕과 지식과 절제에 인내와 경건과 형제우애와 사랑’을 보배로운 믿음 위에 더할 수 있습니다.
3) 뿐만 아니라, 우리가 “더욱 힘써” 곧 ‘부지런함으로, 믿음 위에 ’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와 사랑을 공급’하는 것은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주의 일은 내 힘이 아니라,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주의 은혜를 충만히 부어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늘 바라보고 묵상할 때 주시는 은혜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힘쓸 수가 있는 것입니다.
4.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 5절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믿음에 덕을” 더하기 위하여 더욱 힘을 써야 합니다.
1) 여기서 먼저 “믿음에 덕을” 더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말씀하시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이요,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믿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믿음을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하였는데, 이 땅에서 최고의 가치는 금이나, 은이나, 다이아몬드가 아니요, 믿는 자들에게 죄 사함을 베푸시고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만이 홀로 보배이십니다. 그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믿음이 사람이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 믿음은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말씀하시는 대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주시는 이 믿음을 저와 여러분은 은혜로 선물로 받았습니다.
성도의 신앙의 시작은 바로 이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믿음,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고, 나도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다시 산 자인 것을 믿는 믿음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빛의 자녀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 “믿음에 덕을” 더하라고 말씀합니다.
“덕”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레테’로서 ‘기쁘게 하다. 환심을 사다’라는 동사 ‘아레스코’에사 나온 명사로서 ‘덕, 덕성, 품성의 탁월함’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덕”은 단순히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포용하고, 용서하는 성품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덕”을 이렇게 해석한다면 뒤에 나오는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와 사랑이 모두 “덕”이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덕”은 도덕적인 탁월함, 곧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의 말과 행실로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우리가 드러내는 방식이 바로 도덕적 탁월함을 통해서입니다. 악을 행하고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을 드러내고 비추고 영화롭게 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들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도적적이고 영적인 탁월한 말과 행실로 잘 드러내는 “덕”을 소유한 자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4. 그 다음으로 오늘 본문 5절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덕에 지식을” 더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지식”은 믿음으로 인도하는 구원에 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참된 구원의 지식 곧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를 이루신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과 충분한 대속을 믿음으로 이미 구원받은 자에게 그 보배로운 믿음에 덕을 더하고, 그 덕 위에 더하는 지식을 말합니다. 그래서 구원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지식”이라는 말은 구약 히브어로는 ‘야다’라는 단어이고 신약 헬라어에서는 ‘기노스코’라고 하는데, 이 단어가 사람 사이에서는 부부가 서로를 인격적,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그래서 “덕에 지식을” 더하라는 말씀은 성도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하신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덕 위에 이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이 지식을 더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하신 분임을 잘 드러내고 비추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인격적으로 체험적으로 알아가는 참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 참된 지식을 더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자녀가 가정에 거해야 가족에 관한 지식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자녀이지만, 멀리 떨어져 살고 있으면 지금 부모가 무슨 일을 하고, 무슨 행각을 하며, 무엇이 고민이고,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지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와 구원을 알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그 은혜를 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을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그 사랑에 감사하고, 깨달은 그 사랑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씀합니다.
5. 그 다음으로 오늘 본문 6절에서 “지식에 절제를” 더하라고 하십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저와 여러분에게 절제가 필요한 것은 우리가 보배로운 믿음을 이미 받았고,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었으나, 아직 우리 속에 옛 사람의 자아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6절로 17절에서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보배로운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 하나님과 생명의 교통 속에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복된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의 신분을 얻었지만,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천국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완전한 성화를 이루어 영화에 들어가기 전까지 저와 여러분에게는 육체의 소욕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절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새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끊임없이 싸우기 때문에 우리는 육체의 소욕 곧 패잔병이 된 옛 사람의 원리를 따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절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절제할 수 있습니까? 성령의 감동하심 속에서만 육체를 따르는 일을 절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22절 이하에서 성령의 열매를 말씀하시면서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성령을 따라 행할 때 맺을 수 있는 열매가 지금 살펴 보고 있는 절제와 인내입니다.
6. 그 다음으로 오늘 본문 6절에서 “절제에 인내를” 더하라고 하십니다.
앞서 살펴본 절제가 성도의 심령에서 육체의 소욕 곧 옛 사람의 본성과의 싸움에서 필요한 것이 절제라면, 인내는 밖에서 찾아오는 어려움에 대해서 오래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포기하라는 외부에서 오는 고난과 핍박이라는 박해를 당할 때 성도는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까지 오래 참는 것이 인내요,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진정한 인내입니다.
성도가 인내를 잘 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약속하시는 소망을 가져야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서 “너희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라고 말씀하는데, 인내는 소망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밤을 지워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을 그렇게 하면 좋은 시험 점수를 받고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고 원하는 직장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하늘의 산 소망으로 충만할 때 성도는 인내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6절에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일들입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아들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내어주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약속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서 순교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순교자들의 인내는 하늘의 영광스런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7. 그 다음으로 오늘 본문 6절에서 “인내에 경건을” 더하라고 하십니다.
지난 시간에 “경건”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유세베이아(εὐσέβεια)’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좋은, 바른, 올바른’의 뜻을 가진 ‘유(εὐ)’라는 단어와 ‘경배하다, 예배하다. 깊이 존경하다’는 뜻의 ‘세보마이(σέβομαι)’라는 단어의 합성어로서 이 “경건”이라는 말의 뜻은 ‘올바르게 경외함’을 말하는데, ‘마땅히 공경해야 할 대상을 합당한 태도와 방식으로 예배하고 섬기는 것’을 말한다고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경건”은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하는 예배와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12장에서는 말씀하는 영적인 예배 곧 이 세대를 본 받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이 바로 경건한 삶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절제하고 인내할 때 그 목적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르게 섬기기 위함인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절제와 인내의 목적은 우리 스스로 나 자신을 좀 더 나은 사람으로 훈련하고자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절제하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제와 인내 위에 경건을 더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바 구원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 때문에 우리는 절제하고 인내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경건한 삶에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8. 그 다음으로 오늘 본문 7절에서 “경건에 형제 우애를” 더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형제 우애”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성도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마치 부모로부터 같은 피를 물려받은 친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듯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그리스도에 대한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성도들 상호 간에도 이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형제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를 가지고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참아주고, 인내하며, 그 형제가 고난과 핍박이라는 박해 처했을 때 마치 내가 박해를 받는 자인 것처럼 생각하고 형제를 돕는 것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형제 우애”입니다.
9. 마지막으로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형제 우애”를 넘어서는 불신자들에게 베푸는 사랑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는 불신자들 더 나아가서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들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인데, 그렇다고 하여 죄인들의 행하는 악한 행실에 눈을 감고, 그들을 선량한 사람들로 여기라는 말이 아니라, 죄인들 속에 있는 영혼을 보고 불쌍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를 핍박하는 악한 자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닮기 원할 때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43절로 45절에서 원수 사랑을 가르치시면서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비하신 분이신지에 대한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을 갖게 될 때에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닮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못에 박혀 물과 피를 쏟으시는 그 고난의 순간에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본 받은 스데반도 자기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자들을 위해서 죽어가는 가운데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부르짖고 순교하였습니다.
10. 이렇게 믿음 위에 더하라고 하신 7가지 아름다운 신앙의 실천 사항들은 성도로 하여금 균형 잡힌 삶을 살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값없이 오직 은혜로 주님의 “신기한 능력” 곧 주님의 신적인 능력과 권능으로 주님의 “영광과 덕”을 통하여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성도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자들로서 삶속에서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자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더욱 힘써”야 합니다. 앞서 “더욱 힘써”라는 말이 ‘부지런함으로, 열심히’라는 뜻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우리가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기 위해서 힘써야 할 몇 가지는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먼저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이 뜻에 합할 때’에 둘째는 ‘진리 위에 서’고, 셋째로는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있어야 비로소 ‘보배로운 믿음 위에 부지런함과 열심’을 더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의 뜻에 합하고, 또 우리가 진리 위에 서고, 주의 은혜로 충만한 자들이 되어서 보배로운 믿음 위에 부지런함과 열심으로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기 위하여 저와 여러분 모두는 ‘규칙적인 신앙생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규칙적인 신앙생활이 중요한 것은 공적인 예배의 자리에서 말씀을 듣고 주시는 은혜를 받고, 또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경건한 신앙생활을 규칙으로 감당해 나갈 때 비로소 성도의 마음 중심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규칙적인 신앙생활은 성도에게 영적으로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영적인 근육이 자라게 하고, 영적인 힘을 강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영양 학자들은 사람이 매일 같이 아침에 사과 한 개씩만 꾸준히 1년을 먹어도 몸에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또 의사로부터 몸에서 생성되지 않는 비타민을 먹어야 한다는 처방을 받아서 매일같이 그 비타민을 복용하는 사람도 1년 2년 시간이 지나면 몸의 어떤 부분에 분명한 변화가 나타날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일도 그러할진대, 영적인 일도 마차가지입니다. 규칙적으로 공예배를 통하여 또는 개인의 경건 생활을 통해서 말씀을 듣고 읽어야 진리의 말씀에 붙들리게 되고, 또 그렇게 할 때 심령에 또한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심령에 왕 노릇하여 보배로운 믿음 위에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우애와 사랑을 더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장하는 성도, 또한 모든 어려움을 능히 이기고 천국에 대한 소망 가운데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며 하루하루 순례 길을 승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