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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낮예배 베드로전서 강론(38)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베드로전서 5장 10절로 11절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1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1. 앞 시간에 우리는 이 땅에서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는 지상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하늘의 안식에 들어가 영광을 누리는 승리한 교회의 일원이 되기까지 이 땅에서 근신하고 깨어서 마귀를 대적하라고 명한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근신하라”는 말씀은 ‘어느 것에도 취하지 않은 상태’ 곧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로서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상태’를 유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성도가 ‘제정신을 차린 상태’는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사랑으로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두 번째로 베드로 사도는 마귀를 대적하는 영적인 전투를 하기 위해서 “깨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여기 “깨어라”는 말씀은 잠에서 깨라는 것을 포함하여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빠지지 않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서 자신이 영적으로 잠을 자고 있지 않는지 ‘주시하는 것’과,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는 두루 찾는 마귀를 ‘경계하는 것’이 “깨어라”는 말씀의 의미였습니다.

이렇게 구원 받은 성도 곧 우리가 근신하고 깨어 있을 때 비로소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는 두루 찾는’ 우리의 대적인 마귀를 대적할 수 있습니다. 성도와 마귀의 관계는 대적관계요 원수관계입니다. 이 말은 성도와 마귀는 절대로 타협점을 찾을 수 없는 반대편에 선 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는 두루 찾는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마귀와 타협하는 순간 삼켜지는 것입니다.

이 마귀를 대적하는 방식이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마귀와 대적하여 싸우는 것이라고 베드로 사도는 가르쳐주었습니다. 여기 “굳건하게 하다”는 말은 ‘단단한, 바위 같은, 흔들리지 않는’이라는 뜻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견고히 붙드는 것이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나도 예수님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는 것을 기억하고 행할 때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고난의 현실이 아니라 장차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 성도들에게 주실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고 소망함으로 그 나라의 영광으로 충만한 것이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베드로전서 5장 9절 하반절로 11절의 말씀을 통하여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는 삶이 믿음의 형제들이 맞이하는 “동일한 고난”이라는 말씀과 이 모든 고난에서도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잠깐 고난을 당한” 자들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어서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다고 교훈하는 말씀을 살펴 볼 때에 주의 성령께서 이 말씀을 잘 깨닫게 하시고 이 말씀에 붙들려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2.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5장 9절 하반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 여기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는 말씀은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이 고난을 당하는 자리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성도가 마주한 동일한 고난은 다른 것이 아니라, 마귀를 대적해야 하는 영적 싸움에 참여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는 영적 싸움을 ‘형제들도 당하는 동일한 고난’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찾아 오는 마귀의 유혹과 시험이 마귀가 주장하는 이 세상의 제도와 문화와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고난으로 또는 유혹으로 찾아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당하는 고난도 마귀와 싸워야 하는 영적인 싸움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싸움은 특정한 성도만 겪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상교회 곧 전투하는 교회의 모든 성도가 당면하는 문제입니다. 여기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라고 할 때 “세상”은 복음이 전파된 모든 곳을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당시 소아시아에 흩어진 나그네들 오늘날의 튀르키예 지역의 교회를 향하여 이 말씀을 기록하였지만, 소아시아뿐 아니라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복음이 전파된 곳이라면 그 어느 곳에서라도 그리스도인들은 핍박과 고난이라는 영적인 싸움에 직면한 자들이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이 땅을 믿음으로 살아간 선진들을 소개하고 있는 명예의 전당과 같은 곳인데, 그 믿음의 선진 중에서 고난 곧 영적인 싸움에서 면제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첫 믿음의 사람으로 소개된 아벨은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불로서 응답하실 때에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나 그가 그 형 에서에 의하여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두 번째 믿음의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는 노아도 믿음으로 방주를 지었으나, 1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방주를 만들며 세상을 물로서 심판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지만, 노아의 가족 이외에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인 사람이 아무도 없어 홀로 온 세상의 무시, 멸시를 견디어 낸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고난 없는 신앙생활을 꿈꾸고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거룩한 믿음의 무리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2)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속함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가 된 성도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불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 9절에서 말씀하는 마귀를 대적하는 영적인 싸움에서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동일한 고난의 값을 치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모두가 함께 참여하고 있는 이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돕고 격려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0장 24절에서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의 영적인 싸움은 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어깨를 기대고 싸우는 공동체적인 싸움인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레드우드라는 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는 높이가 100미터 넘게 자라는 코스트 레드우드와 나무의 지름이 최대 11미터 이상이 되는 부피가 가장 큰 나무인 자이언트 세퀘이어가 있습니다. 이렇게 높이와 부피가 큰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이 나무들의 뿌리는 땅속으로 내리는 뿌리의 깊이가 1,2미터이며 깊이 내려도 3미터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태풍에 이 나무들이 쓰러지지 않습니다. 이유는 이 나무들이 뿌리를 동서남북 사방 옆으로 40미터 내지 50미터를 뻗어나가면서 다른 나무들의 뿌리와 얽히고 설켜서 땅 전체가 마치 하나의 뿌리로 연결된 것처럼 단단히 이어져 있어서 강력한 태풍에도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성도가 있다면 그런 고통을 이미 경험한 성도가 찾아가서 교제를 나눌 때, 서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후 249년부터 주후 262년까지 약 15년간 로마 전역을 휩쓴 대 규모 전염병이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시프리안 대역병이라고 불렀는데,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감독이던 시프리안이 이 전염병을 자세히 기록했기에 시프리안의 대역병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이 대역병 오늘날 흔히 부르는 팬데믹의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천연두, 홍역, 또는 바이러스성 출혈열로 인하여 로마에서는 하루에 수천 명이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이 이 전염병에 감염되면 감염을 두려워하여 가족을 버리고 도망치던지, 길거리에 방치하였습니다. 치료제가 없던 시기에 이 감염병에 걸린 사람들은 죽을 날만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그 때 그리스도인들이 이 병에 감염되지 않았음에도 환자들을 씻겨주고, 음식을 먹여주고, 죽을 때까지 그 곁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형제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교도들도 돌보아 주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환자를 돌보다가 자신도 감염되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셨으니 우리도 형제를 위해 생명을 내어 놓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고백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길이 주님께 가는 길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 형제가 병든 나를 위해서 목숨을 내 놓고 병간호를 해주면서 하늘 소망을 가지라고 말할 때, 성도의 심령이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이들의 목숨을 건 사랑과 선행의 격려는 결국 로마제국 전체를 감동시켰고, 로마에서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로 삼게 되는 요인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교회역사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하는 성도들은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가운데 영적인 싸움을 감당하고 또 주시는 은혜 가운데서 승리해야 하겠습니다.

3. 오늘 본문 10절에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당하는 동일한 고난을 통해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드시고, 또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분이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신 성도들에게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물론 성부만 은혜의 하나님이 아니라,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한분 하나님께서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은혜”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리스’를 단어 인데, 이 단어의 뜻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기쁨을 주는 호의’라는 뜻인데, ‘기뻐하다. 즐거워하다’라는 뜻의 ‘카리오’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은혜라는 말이 가장 잘 표현된 곳이 에베소서 2장 8절인데 “너희는 그 은혜(카리스)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은혜”는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는 아무런 값을 치를 수 없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구원’을 뜻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는 잠깐 스쳐 지나가는 약간의 도우심이 아닙니다. 일생동안 우리로 이 땅에서 건강하게, 아프지 않게 살게 하심도 은혜입니다. 물질이 어려움이 없이 살게 하심도 은혜입니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의 은혜는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창조 때 주시기를 원하셨던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복되게 사는 본질적인 것으로서, 한번 지나가는 세상에서 건강, 평안, 풍요, 장수를 누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모든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천국의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하시는 영생의 복이 진정한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시간이 지나도 허무하지 않고,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기쁘고 복되게 하며, 영원히 떠나지 않고 우리에게 항상 머무는 것 참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4.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통로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곧 우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 우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일은 바로 “부르사”라고 말씀하시는 대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먼저 택하셨고, 택하신 저와 여러분을 이 구원으로 부르신 것이 첫 번째 일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라고 말씀하시는 대로 창세전에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일이 먼저 있었고, 그 선택을 따라서 우리를 구원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모든 은혜의 시작은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일이었습니다.


2) 그리고 그 모든 은혜의 마지막은 오늘 본문 10절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입니다.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를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 부르신 최종 목적이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창세전에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어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기까지 그 중간 과정이 있는데, 그 중간 과정의 일들을 다 포함하여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말이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선택하신 것이 은혜요, 택한 백성인 저와 여러분을 성령께서 복음을 통하여 부르심이 은혜요, 부르신 자들로 복음을 듣고 믿게 하시어 거듭나게 하심으로 새 생명을 주신 일이 은혜입니다.

거듭난 자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는 회심이 은혜요, 그런 자들을 의롭다 하시는 칭의가 은혜요, 의롭다 하신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도 삼아주심도 은혜요, 자녀 삼아주신 자들을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닮게 하시는 성화를 이루게 하심도 은혜요, 끝까지 믿음을 지키도록 성령으로 붙들어 주시는 성도의 견인도 은혜요,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 부활의 새로운 몸을 입고 성화가 완성된 영화로운 상태로 천국에 들어가게 가시는 것이 은혜요, 천국에서 영원토록 영광을 누리는 영생의 삶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 우리가 누릴 영원한 은혜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의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이 모든 은혜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백성인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5.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은혜를 베풀어 주시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곧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1) 베드로 사도는 1장에서부터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곧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행하신 일인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 바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우리의 대속의 제물로 이 땅에 보내 주셨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어 천국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대신 완전한 구원의 길을 완성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마음 아파하며 회개의 눈물을 많이 흘리고, 금식을 오래 해야 그 공로로 죄 사함을 받고, 또한 선하고 의로운 일을 많이 해야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구원과 관련하여 항상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루신 두 가지 큰 일 곧 완전한 순종과 충분한 대속을 나를 위해서 이루셨기 때문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2)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충분한 대속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① 여기서 말씀하는 인생의 무거운 짐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율법대로 살아야 할 의무 아래 태어난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찾아오는 좌절과 절망, 곧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생으로 지킬 수 없는 율법의 요구 아래 태어났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인생이 짊어진 무거운 짐입니다.

둘째로 율법대로 살 수 없는 인생,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받아야 하는 죄의 짐이 또한 무거운 짐입니다.

그런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향하여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인생 중에는 어느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이 짐을 진 자들을 쉬게 하시고, 구원해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이 무거운 짐을 홀로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완전한 순종과 충분한 대속을 통하여 이 일을 완벽하게 이루어주셨습니다.

② 완전한 순종은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대로 순종해야 하는 모든 요구를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신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이라서 율법대로 살 수 없는 타락한 본성의 소유자들이지만,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심으로 아담의 원죄를 물려받지 않으신 죄가 없는 참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실 수 있으셨습니다. 이것을 바로 완전한 순종이라고 하는데, 개혁주의 학자들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③ 충분한 대속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범한 죄에 대한 대속의 값을 충분하고 완전하게 지불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저와 여러분이 지은 죄를 인하여 영원토록 지옥에서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에 대한 충분한 값을 다 지불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 또는 받으신 순종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우리가 줄기차게 강조하고 외쳐야 하는 이유는 바로 성경이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요구하시는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 또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속의 값을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충분한 대속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을 때, 예수님의 의를 나의 것으로 여겨 주시어 의롭다 하시는 칭의의 방식 이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6.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셨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 “너희”는 오늘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부르다”라는 단어는 ‘깔레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신분이 높은 이가 내리는 부르심 또는 소환’을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곧 ‘이름을 예수라 부르라(칼레오)’고 하실 때도 사용된 단어인데,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불러 이름이나 사명을 주실 때 사용된 이 말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의 삶속에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있음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지금 고난당하는 소아시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여러분이 지금 고난을 당함으로 마음이 낙담되고, 원망과 불평이 입에서 터져 나오고, 현실이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우리를 부르신 분은 주 하나님이신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르신 분은 주 하나님이신데, 이 “모든 은혜” 곧 “영원한 영광”을 주시려고 부르신 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에게 계획하신 모든 일은 반드시 성취되도록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7. 오늘 본문 10절에서 이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잠깐”이라고 하시고, 또 이 “잠깐 고난”을 통하여 고난 당한 우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신 후에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0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잠깐의 고난을 통과하게 하심으로 (1) 온전하게 하시고, (2) 굳게 하시고 (3) 강하게 하시고 (4) 터를 견고케 하신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동사를 4가지나 나열한 것은 강조하기 위한 것이나, 잠깐의 고난을 통과하는 성도가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도록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말씀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1) 먼저 “잠깐 고난”이라는 말은 “영원한 영광”과 대조되고 있습니다.

고난은 잠깐이나 영광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성도가 고난을 받아도, 성도인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고난을 받아도 우리를 이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실 것이니 고난조차도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7절로 18절에서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같은 내용을 표현을 달리하여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한 성령으로 사도를 영감하여 주신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경이 유기적인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증거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로 이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성도로 만드시려고 잠깐의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잠깐”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올리고스’라는 ‘아주 적은, 짧은 시간 동안의, 찰나의’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일평생 계속 될 수도 있고, 고난의 무게가 목숨을 내 놓아야 할 만큼 큰 고난을 당하기도 하는데, 왜 베드로 사도는 성도가 당하는 일생의 고난과 목숨을 내 놓아야하는 세상에서 가장 큰 고난까지도 “잠깐 고난”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 땅에서 그 고난의 무게가 아무리 무겁고, 고난의 시간이 길다하여도 영원한 영광에 비추어 볼 때 “잠깐 고난”이요, ‘작은 고난’이라는 말입니다. 잠깐의 고난을 당한 자들에게 영원한 영광으로 갚아 주시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잠깐의 고난과 영원한 영광은 비교할 수 없는 크기의 복과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영광”을 받기 위하여 기꺼이 “잠깐 고난”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잠깐 고난”을 통과하게 하심을 통하여 베푸신 은혜가 4가지라고 베드로 사도는 말하고 있는데, 그 첫째가 “온전하게 하시며”입니다.

“온전하다”는 말은 ‘카타르티조’인데, ‘∼을 향하여’라는 뜻의 ‘카타’와 ‘다 갖추다. 끝에 이르다’라는 뜻의 ‘아티조’의 합성어로서 이 단어가 마가복음 1장 19절에서는 제자들이 그물을 깁는 것에 사용된 단어로서 ‘찢어진 그물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게 하다’라는 의미에서 ‘온전하다. 원래 상태로 완전하게 회복시키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니 여기 “온전하게 하다”는 말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성도가 되도록 잠깐의 고난으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잠깐 고난”을 통과하게 하심을 통하여 베푸신 은혜가 4가지라고 베드로 사도는 말하고 있는데, 그 둘째가 “굳건하게 하시며”입니다.

여기 “굳건하게 하다”는 말은 ‘스테리조’라는 단어인데 ‘기둥을 세워 지탱하다. 고정시키다. 흔들리지 않게 단단히 잡다’라는 뜻의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고 하실 때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굳건하게 하신다는 것은 ‘흔들림이 없는 마음의 평화’를 말합니다. 연단을 받을수록 성도의 심령은 미풍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길에 흔들리지 않게 하시는 방식이 잠깐의 고난이라고 말씀합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고난 때문에 믿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늘 소망을 굳건하게 하는 방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참 믿음과 그렇지 않은 거짓 믿음이 여기서 판별이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잠깐 고난”을 통과하게 하심을 통하여 베푸신 은혜가 4가지라고 베드로 사도는 말하고 있는데, 그 셋째가 “강하게 하시며”입니다.

여기 “강하게 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스테노오’인데 ‘힘, 근력’이라는 ‘스테노스’에서 나온 동사로서 ‘근력을 강하게 하다. 활력을 공급하다’는 말입니다. 고난을 능히 이길 영적인 힘과 은혜를 부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마치 바람이 불어야 나무가 그 뿌리를 더 깊이 땅에 내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잠깐의 고난을 우리에게 주시어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뿌리를 우리의 믿음의 터인 주님께 뿌리를 깊이 내리게 하심으로 고난이라는 풍파에 흔들리지 않는 자로 ‘강하게 하시고, 힘 있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잠깐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로 그 고난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영적인 힘과 근육을 키워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자라게 하심으로 흔들리지 않는 강한 사람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5)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잠깐 고난”을 통과하게 하심을 통하여 베푸신 은혜가 4가지라고 베드로 사도는 말하고 있는데, 그 넷째가 “터를 견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터를 견고하게 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테멜리오세이’인데, ‘반석, 기초’를 뜻하는 ‘테멜리오스’에서 나온 단어로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집을 지을 때 단단한 반석, 또는 암반위에 기초를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잠깐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낙심하거나 좌절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고난을 통과하는 자와 함께 하심으로 성도가 자신의 삶 전체를 그리스도라는 불변의 반석위에 단단히 신앙의 기초를 세우게 하심으로 어떤 풍파에도 결코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는 주님을 모신 거룩한 집으로 세워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터가 견고하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 견고히 붙어 있다는 말입니다. 바람이 불수록 주님을 멀리 떠나 세상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 예수께 바짝 붙어 지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과 연합함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이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고난은 고통이 아니라, 유익입니다.

9. 이 일을 권능이 세세토록 있으신 하나님께서 이루신다고 11절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권능이 세세 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여기 “권능”이라는 말은 ‘크라토스’인데, ‘권능, 힘, 능력’이라는 뜻의 단어인데, 단순한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도하고 계획하신 대로 이루시는 ‘다스림의 권세’를 말합니다. 오직 주 하나님께만 잠깐의 고난 받는 성도들을 당산의 백성으로 온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터를 견고케 하실 수 있는 능력과 주권이 세세무궁토록 주님께만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뒤 구절인 12절로 14절은 마지막 인사말씀이고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는 본론의 결론이 바로 오늘 10절로 11절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결론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난과 핍박이라는 박해를 당하는 성도들에게 현재 당하는 박해의 정도가 목숨을 내놓아야 할 만큼 심각할지 라도 장차 주어질 영원한 영광에 비교하면 이 땅에서 당하는 그 어떤 어려움과 고난과 고통과 박해라 해도 잠깐의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그 고난 속에서 고통당하는 성도를 하나님께서는 지켜보시기만 하시면서 싸워서 이기면 영원한 영광이 예비되어 있다고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데, 고난에 직면한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온전케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신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런 은혜를 날마다 저와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베풀어 주시어서 어떤 고난 속에서도 믿음이 흔들리거나 낙심하고 좌절하는 대신 잠깐의 고난 너머에 영원한 영광을 예비하신 하나님의 큰 구원과 사랑을 기억하게 하심으로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터를 견고케 하시어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합당한 성도로 견고히 서게 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