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AT JOONGSIM

강의안

말씀을 배우고 삶으로 나누는 자료입니다.

주일 낮예배 구원에 이른 믿음의 표지(65) "세미하나 확실한 소리를 듣는 자"

열왕기상 19:11-13 ; 베드로후서 1:19-21



왕상 19: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9: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9: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벧후 1: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1: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I

1. 오늘도 본문을 강론할 때 주님의 성령께서 오늘 증거되는 본문 말씀으로 저와 여러분을 가르치시기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힘이 없어 미약한 데서 일으켜 세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바른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 믿음’ 안에 견고하게 서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회개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그 사람이 거듭난 사람임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면서 말하였습니다.

행 20: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이것이 성경 전체가 말하는 바, ‘믿는 자들을 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2. 오늘 그 점을 염두에 두면서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의 본문 말씀과 신약성경의 본문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우리는 이전 설교에서 열왕기상 19장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무엇을 들었습니까?

살 의욕과 의미를 상실할 정도로 낙담한 엘리야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되, ‘세미한 소리, 음성’ 속에서 당신의 임재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은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식을 들었습니다.

베드로사도는 자기의 서신 속에서 자기가 본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큰 영광과 거기서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증거합니다.

벧후 1: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그러면서 베드로 사도는 더 나아가 ‘확실한 예언’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벧후 1: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와 능력과 영광’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벧후 :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1) 엘리야가 들은 ‘세미한 소리 또는 음성’

(2) 베드로사도가 우리 주 예수님의 변화산상에서 본 우리 주님의 지극히 큰 영광

(3) 그리고 그 속에서 하늘로부터 들려온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 곧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심으로 ‘아들이신 예수님을 존귀하고 영화롭게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

이 셋은 별개로 따로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죄 밖에 없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구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방식’입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기름 부으시어 믿고 알게 하시는 분이 우리 안에 보혜사로 계신 성령님이십니다. 이런 큰 그림 속에서 오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듣기를 원합니다.

II

1. 먼저 엘리야를 ‘더 이상 살 의욕과 소망도 잃어 버리고 낙담한 상태에서’ 건져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의 방식을 더 자세하게 살펴 봅시다.

엘리야를 낙담에서 일으켜 세우신 하나님은 어떤 얼굴로 당신 자신을 나타내셨습니까?

엘리야의 말대로라면, 당시 이스라엘의 모든 이들은 다 하나님께 등을 돌렸는데 ‘엘리야만 그 믿음의 순전을 지켰습니다.’

왕상 19:4 (엘리야)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자, 이런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셨습니까?

‘엘리야의 그 공을 치하하고 그것을 근거로 자비를 베푸셨는가요?’

엘리야의 생각은 오직 하나에 꽂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자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배도하였고 믿음의 순전을 지키는 자는 오직 나 하나 뿐이다.”

호렙산에 이르러 그 굴에 숨어 있는 엘리야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셨습니다.

왕상 19: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9: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엘리야가 강조하는 요점은 무엇입니까?

왕상 19:10 그(엘리야)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엘리야는 ‘하나님을 위한 자기의 열심’을 어느 정도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닙니다. 나 혼자만은 하나님을 위한 열심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이 엘리야의 대답 속에서 우리는 두 요소를 발견합니다.

(1) 자기의 믿음을 순전하게 지킨 것을 공력으로 삼는 은근한 심사

(2) 그리고 그 심사는 하나님을 향한 불만으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이런 식입니다.

“제가 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가진 열심히 얼마나 큰 지는 하나님도 아시지요.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버린 가운데서도 저는 주님께 믿음의 순전을 지켰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의 제단을 헐고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저만 홀로 남았습니다. 그들이 제 생명도 찾아 빼앗으려 합니다.”

그런 엘리야의 심정에는 ‘자기 순전한 행사에 대한 공력의 과시’와, ‘하나님께 대한 불만’이 들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엘리야가 참으로 거룩한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기지요.

‘거룩하게 되는 성화의 높은 수준’에 올랐던 자가 어떻게 그런 식으로 미끄러질 수 있을까?

존 칼빈 목사님은 말하였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높은 수준의 성화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그 열매 속에는 여전히 죄의 잔재가 묻어 있다.”

참으로 우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죄성은 무섭고 추하고 악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울부짖었습니다.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엘리야의 마음과 생각 속에는 ‘자기의 믿음의 순전을 공로로 과시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엘리야의 마음 속에는 ‘대번’에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불만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들을 지으시고 통치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어찌 그런 이스라엘 자손들의 악을 징치하지 않으시나요? 악인들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악녀 이세벨이 판도를 장악하고 하나님의 보내신 모든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저만 홀로 남았습니다. 그녀가 내 생명을 찾아 죽이려 합니다. 그런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왜 가만히 계십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하나도 없기를 바라시는 것은 아닐 텐데, 어찌 잠잠히 보고만 계시나이까?”

이런 불만은 엘리야만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도 그랬습니다. 다윗도 그랬고, 이사야도 그랬고, 예레미야도 그랬고, 하박국도 그랬고. . .아니, 우리도 아주 자주 그러합니다.

‘무엇을 잘하였다’는 생각이 ‘자기를 내세우고, 남들이 나를 알아 주기를 바라고’ -그런 연장선상에서 ‘내가 이렇게 순전한데 하나님은 그에 대한 보답을 주시지 않네’ 하는 불만이 불쑥 튀어나옵니다.

‘하나님의 통치 방식에 대한 불만이 우리 마음 속에서 불쑥 불쑥 튀어 나옵니다.

성경은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다윗이 이런 마음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시 77:3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77:4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77:5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77:6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77:7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77:8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77:9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셀라)

우리도 늘 이렇게 속으로 말합니다.

“내가 이 정도로 순전하게 했는데, 주님이 왜 나를 모르시는 척하시는가? 내게 복을 주시거나 내 짐을 덜어 주시기는 커녕 고난을 더 크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니면 “내가 이 정도로 하니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복을 부어 주시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 방식은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금방 이렇게 바뀝니다.

“어찌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제가 하나님께 행한 것은 기억하지 않으시나요?”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서 누워 자면서 무어라 하나님께 간청하였습니까?

왕상 19: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사랑하시는 여러분,

‘자기가 믿음의 순전을 지키고 성실하고 내 몸이 부서질 정도로 최선을 다한 것을 공력으로 삼는 순간,’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사라지고 불만이 일어납니다.

‘자기 공력에 대한 과시, 자기 성실성과 순전함에 대한 자부심 –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불만과 원망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자기 공로 사상과 하나님께 대한 불만은 둘이 아니라 한 태, 우리의 옛 사람의 죄의 본성에서 난 것, 곧 육신의 생각’입니다.

2. 그런 엘리야를 어떻게 다루셨습니까?

바꾸어 ‘그런 우리를 어떻게 다루십니까?’

엘리야를 다루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여전히 그런 방식으로 다루십니다. 모양과 형식은 다르나 그 본질은 같습니다.

먼저 지적할 것은, 하나님의 자녀, 구원받은 사람이 ‘우울과 영적 침체에 빠지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런 침체를 ‘심리적으로 정신의학적으로’ 치료하거나 접근하려는 시도를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되었습니다.

여러분,

‘자기 공력 과시 - 영적으로 교만 - 하나님께 불만 – 영적 침체’ - 이는 하나님 앞에서 죄입니다.

그러므로 심리적으로 치료하지 말고 성경의 복음적인 방식으로 치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영적으로 소생하게 하시는 방식이 바로 그 복음적인 처방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3.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먼저 어디로 인도하셨습니까?

‘호렙산’ - 하나님의 산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왕상 19: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19: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이렇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습니까?

왜 ‘호렙산’에 이르게 하셨습니까? 본문에서 그 산을 가리켜 ‘하나님의 산’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영적 교만(자기 공력 과시)’과 ‘침체’와 ‘낙담(이것이 다 한 벌, 한 쌍의 내용)’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제일의 처방은 ‘하나님의 공의의 표현인 율법 앞에 우리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호렙산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 산의 어느 굴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굴 속에 있던 엘리야의 심정에는 오직 ‘자기 생명을 노리는 자들에 대한 두려움과 자기 공력에 대한 생각과 하나님께 대한 불만’만 있었습니다. 그 산 굴 속에서 그는 아무 변화도 없었습니다.

호렙산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던 산,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이 정말 무섭게’ 나타났던 산이었습니다.


출 19: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19:4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19:7 모세가 내려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들 앞에 진술하니

19:8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을 여호와께 전하매

19: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들이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 함이니라 모세가 백성의 말을 여호와께 아뢰었으므로

19: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그들에게 옷을 빨게 하고

19:11 준비하게 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셋째 날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19:12 너는 백성을 위하여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

19:13 그런 자에게는 손을 대지 말고 돌로 쳐죽이거나 화살로 쏘아 죽여야 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막론하고 살아남지 못하리라 하고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를 것이니라 하라

여기서 우리는 ‘아무도 그냥은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 그냥 나아가면 반드시 돌격하여 죽여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위용’을 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 호렙산 굴에 들어가 머물면서 그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음에 분명합니다.

죄인임에도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인간 수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과 그 하나님의 공의와 그 위엄과 그 심판의 두려움’을 생각하는 것 보다는 ‘여전히 자기에게’ 머물러 있었습니다. 정말 사람은 스스로 내버려두면 새 만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7: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여러분, 저나 여러분이나 다 각자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고 우쭐대고 교만하기’를 얼마나 잘 하는지요.

정말 아무도 자기 스스로는 ‘자기의 허물을 살피려고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에 자신을 바르게 비춰보지 못합니다. 호렙산에 이르러서도 엘리야는 여전히 자기에게 머물러 그 굴속에 은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 자녀, 구원받은 자녀가 그런 자리에 오래 머물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임하셔야 엘리야가 다시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 이야기 엘리야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왕상 19: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9: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변화되지 않은 엘리아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4. 그러나 하나님께서 임하셨으니 그의 치료가 시작이 됩니다.

왕상 19: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지나가신다’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엄의 영광을 보여 주시고 지나가신다”는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금방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이 있었습니다” - 그러나 “거기에는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 ‘여호와 앞에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은 분명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하게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고 땅의 터를 진동하고 모든 것을 삼키는 불’은 ‘하나님께서 지나가신 후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그 일은 하나님이 일으키신 일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나타내시려 합니까?

‘진노하시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가공할 위엄’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불순종하고 도전하고 배역한 사탄과 그에 속한 악한 천사들과 사탄의 꾀임을 받아 범죄한 모든 인생들에 대한 하나님의 정죄와 그 심판의 위엄을 ‘큰 바람, 지진, 불’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는 호렙산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적에 드러내신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와 죄에 대한 가공할 진노와 심판’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의 율법 앞에 서서 자신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판단, 하나님의 정죄와 지옥 형벌의 일을 정말로 믿습니까?

그 하나님의 심판 앞에 자신이 누구라고 여깁니까?

여러분 스스로 그 앞에 나아갈 공력이 있습니까?

엘리야는 ‘나는 하나님을 위하는 열심과 순전을 지키나이다’는 것을 그 하나님의 공의의 법정에 내어 놓을 수 있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무슨 공로, 무슨 열심, 무슨 성실함, 무슨 최선을 하나님 앞에 제시하면서 자랑할 수 있습니까?

그 미련함에 대하여 성령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롬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10: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자기 의를 세우려고‘ - 이것이 인간의 죄의 본성의 고집입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의 율법을 주시면서 ‘율법대로 심판하시는 공의와 그 엄격함과 그 위용’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엘리야에게 바로 그 호렙산의 장면의 일부를 다시 상기시키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 앞에 엘리야가 자진 정서는 오직 하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두려우신 공의의 하나님,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죄인됨 밖에 생각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믿음의 순전을 지킨 자기의 열심에 대한 공력과 하나님께 대한 불만’에 대한 생각은 어디로 가고, 오직 ‘자기의 죄인됨과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과 공포심’ 밖에는 그 마음을 사로 잡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이 자기로서는 없음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자기의 죄인됨’에 대한 의식 밖에는 가질 수 없었습니다.

‘큰 바람, 지진, 불’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는 것은 ‘그 속에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율법의 공로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의 ‘선행과 공덕과 성실성과 최선을 다한 것, 지성이면 감천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까?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복을 끌어낼 수 있습니까?

‘엘리야가 나만 혼자 순전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그 하나님의 공의의 율법 앞에 내어 놓을 수 있습니까? 엘리야가 ‘자기의 순전을 지킨 일’을 근거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큰 바람, 지진, 불’ 속에 ‘안 계셨습니다.’

곧,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공의와 완전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율법 자체 안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이 없고 오직 정죄와 심판과 진노와 형벌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롬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하나님의 율법과 공의 앞에 우리는 한 갖 ‘죄인 중 괴수’일 뿐입니다.

III

1.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엘리야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왕상 19: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9: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세미한 소리와 함께 하시어 거기 계시는 하나님’ - ‘세미한 소리’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원어를 보면, “잔잔하고 작은 소리 – 속삭이듯이 부드럽고 자비한 음성, 강한 바람과 요동치는 지진과 모든 것을 사르는 불꽃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여리고 미세하여 힘이 없어 보일 정도의 음성” - 이는 ‘엘리야의 입장에서는 쉽게 접근하고 나아가 수용하기에는 쉬운 음성, 엄하게 꾸짖는 음성이 아니라 다정하여 얼른 가까이 나아갈 음성,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 그 음성 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임재와 영광을 보여주시면서 엘리야에게 나아 오셨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그 소리를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굴 어귀에 섰습니다.”

엘리야는 자기는 아무것도 자랑할 수 없는 죄인됨을 의식하고 오직 ‘그 세미한 소리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 임마누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는 은혜에 자신을 맡기고 나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엘리야의 회복의 영광스런 순간이었습니다.

2. 엘리야가 들은 ‘세미한 소리 – 그 가운데 계신 하나님’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정말 우리 죄인이 늘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길은 우리 주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히 4: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정말 예수님은 시끄럽고 혼돈되고 어둔 세상에서는 들리지 않고 세력이 없고 미미한 존재 같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세상에서 늘 무시를 당합니다.

사 53: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정말 시끄러운 세상 소리에 묻히면 들리지 않을 ‘연약하고 미세한 소리’처럼 임하시어 사람들이 무시한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아이들도 가까이하기에 좋으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친구셨습니다.

죄를 미워하셨어도 회개하면 받아 주시었습니다.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자기에게 오는 죄인들을 다 받아 주셨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대낮에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향해서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부드럽고 자비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던 예수님,

그 예수님이 이 ‘엘리야가 들은 세미한 음성 속에 계신 임마누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말합니다.

벧후 1: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변화산상에서의 예수님의 영광은 예수님의 정체를 보여주신 것이고,

산 아래서 온유하시고 겸손하시어 죄인들의 친구로 용서하신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양으로서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벧후 1: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베드로는 세상의 상태를 어둠에 비유합니다. 모든 인간의 세대가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판도는 항상 어둠, 우울, 낙담, 절망의 판도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두워도 빛이 있으면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 빛은 ‘우리의 영원한 의이신 오직 예수님가 그 십자가에 못박히심의 구속의 은혜’ 뿐입니다.

그분 안에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확실한 길’이 있습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히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지금도 세상의 소란하고 시끄러운 어둠의 혼돈이 계속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오직 믿음 있는 자, 구원받은 자만 듣는 ‘세미한 소리’입니다.

그 ‘세미한 소리 가운데 계셨던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어둔데서 비취는 등불 같이 확실하게 기록된 성경’으로 확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확실한 성경을 믿는 엘리야가 들었던 세미한 음성’을 듣는 자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항상 확증되고 효력있는 복음의 말씀은, ‘세상 전체가 무너지고 최후의 심판날 모든 세상이 불에 녹아 떠나가도 우리의 영원한 영광의 복락의 보장’입니다.

구원신앙의 확실한 표지는 세상에서 ‘세미한 소리’나 의미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 임마누엘의 예수님,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가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줄 정도로 헌신해도 그것을 내세우는 순간, 교만과 침체와 낙담과 불만의 늪으로 떨어집니다. 그러면 그것이 사람을 갉아 먹는 벌레요.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면전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의 자리에 연연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하면 분내고 섭섭하고, 남과 비교하니 늘 스트레스로 고민합니다.

‘영적인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 받는다’ - 그것은 잘못된 함수관계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 중에서 헌신한 사람은 아무리 했어도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만 자랑’합니다. 그리고 그런 이는 “나의 나된 것은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주님을 위하여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그 고백을 지키려 하였습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아무리 연약하여 넘어져 누추하게 되었다 하여도 ‘자기의 죄인됨을 인하여 하나님께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면’ 다시 새롭게 되고 자유함을 얻습니다.

벧후 1: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1: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우리 마음에 광명의 새벽별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 선명해 지기 까지 말씀을 주목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1: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