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예배 베드로전서 강론(37) "근신하고 깨어 마귀를 대적하라"
베드로전서 5장 8절로 9절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1.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십자가에 못 박은 정신과 원리로 유지되는 이 세상에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같은 지체인 성도 개개인이 어떤 자세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1)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전 우주적으로 단 하나입니다.
이 주님의 몸 된 하나의 교회를 표현하는 용어가 보편교회입니다. 이 보편교회 안에는 이미 이 땅의 순례 길을 가는 동안 영적인 싸움을 마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성도들도 있는데, 그들을 일컫는 표현이 하늘에 있는 천상 교회, 승리한 교회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아직 이 땅에 남아서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는 교회, 이 싸움이 끝나면 하늘 영광에 들어갈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로 구성된 교회를 지상교회 또는 전투하는 교회라고 부릅니다. 승리한 교회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으나, 지상교회는 이 순례 길을 마치는 날 까지 영적인 싸움이 끊이질 않기에 전투하는 교회라는 부르는 것입니다.
2) 바로 이 치열한 영적 전투의 최전선에 서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지난 시간에는 오늘 본문 앞 구절인 7절 말씀을 통하여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라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성도가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야 하는 이유는 - 스스로 염려를 짊어지고서는 염려와 싸우느라 영적인 싸움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으로 인한 환난과 고난을 인하여 염려하였으며, 또 모든 시대 그리스도인 중에서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약속해 주셨는데 일용할 양식보다 더 많은 세상 것을 가지려는 욕심으로 염려하는 자들이 있었고, 더 나아가 자신에게 당면한 문제들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하고자 할 때 염려하게 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모든 문제를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마음이 곧 교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이 교만하여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하나, 인생은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 모든 염려를 전지전능하시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려 구속하신 사랑의 주님께 맡길 때 주님께서 나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긴 성도를 돌보실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돌보신다”는 말씀은 ‘생각한다. 염려한다’는 뜻이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염려를 주님께 맡길 때 주님께서 돌보신다는 말은 다른 말로 내가 염려하는 모든 문제를 주님이 대신 생각해 주시고 내 대신 염려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길 때 나의 염려를 대신 염려해주시어서 가장 좋은 해결책을 주실 줄 믿고 염려를 그치고 우리는 그저 하나님 앞에서 감당해야 할 일들을 이루며 하루하루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3) 지상 교회 곧 전투하는 교회에 속한 저와 여러분이 우리의 염려를 주님께 맡겼다면 그 다음은 근신하고 깨어,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는 우리의 대적 마귀를 대적하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주께서 기뻐하시는 성도의 영적인 싸움이 소극적으로는 모든 염려를 다 주님께 맡기는 것이라면, 적극적으로는 우리의 대적 마귀와 싸워야 하는데 그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는 근신하고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2. 성도가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근신하고 깨어서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두루 찾는 마귀를 대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우리의 대적 마귀를 우리가 대적하여 싸워 이기지 않으면 우리는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는 마귀에게 삼킴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삼키다”는 말은 ‘카타피노’라는 말로서 그 뜻은 ‘완전히 마셔버리다, 소멸시키다’는 뜻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마귀를 대적하지 않아서 마귀에게 삼킴을 당한다 해도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 주신 영원한 구원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지상교회 곧 전투하는 교회 안에서 성도가 마귀에게 삼키게 되면 영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떨어지게 되어 구원 받은 성도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탄 마귀에게 삼키게 되면,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채 깊은 영적 침체와 절망의 늪에 빠질 것이며, 세상 염려와 두려움에 압도되어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게 되고, 구원이 취소된 것은 아니나 구원의 기쁨과 평안을 다 빼앗긴 채 세상과 죄에 매여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성도는 결코 방심하지 말고, 우리의 원수인 마귀를 대적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또한 우리가 받은 놀라운 구원의 은혜에 비추어 볼 때, 근신하고 깨어 마귀를 대적해야 하는 것을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존 플라벨은 우리가 받은 죄 사함의 구원 곧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할 자들을 구원하신 은혜를 설명하면서, 죄에서 용서를 받은 일은 그 무엇보다 큰 은혜라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그의 글에 설명을 조금 더하면 이런 주장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은혜는 사형 판결을 받고 사슬에 묶여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사형수에게 내려진 사면령과 같은 것이며, 빚을 진 자가 그 채무를 갚기 위해서 집과 재산을 다 팔고 자신도 노예로 팔려야 할 처지에서 채무를 탕감 받은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따져보면 죄 사함의 은혜는 이 보다 더 큰 은혜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을 하나,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서는 자는 영원한 지옥 형벌이 예비되어 있을 뿐입니다. 구더기도 죽지 않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서 무한히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저와 여러분이 받은 구원은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싸구려 구원이 아닙니다. 이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는 독생자를 우리의 대속의 제물로 이 땅에 보내주셨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하는 모든 율법의 요구에 완전한 순종을 대신 이루어 주셨고, 또한 우리의 죄 값에 충분한 대속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값을 치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우리가 받지 못했다면, 영원토록 죄에 대해서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떨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나를 이 죄에서 구원 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신하여 형벌 받으심으로 나를 구원하신 것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이 영광스런 구원받은 성도는 절대로 육체의 남은 때를 세상 중심으로 살 수 없고, 나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이며, 주님께서 구원받은 성도에게 명하신 거룩하고 선한 삶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고 우는 사자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는 성도의 대적인 마귀에게 삼킴을 당하는 것은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부당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살기에는 우리가 받은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3.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8절에서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우리의 “대적 마귀”에게 삼킴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에게 “근신하라”고 권면해주시고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앞서 7절에서 염려를 주님께 맡기라고 말씀한 베드로 사도는 여기 8절에서는 근신하라고 말씀합니다. 어려움으로 인하여 마음과 생각이 여러 가지로 갈라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인 염려와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가 “근신하라”고 하신 말씀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여기 “근신하라”는 말씀은 헬라어로 ‘네포’라는 말인데, 이 단어는 ‘∼가 아니다’라는 뜻의 부정 접두어 ‘네’와 ‘마시다’는 뜻의 ‘피노’가 결합된 단어로서 문자적인 의미로는 ‘마시지 않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로서 ‘술에 취하지 않다. 제정신을 차리다’는 뜻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1) 이 단어가 데살로니가전서 5장 6절로 8절에서 술 취해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정신을 차리라”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여기 7절에서 밤에 술에 취해 감각과 이성을 잃어버린 자들을 취한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와 완전히 반대되는 낮의 자녀들의 상태를 6절과 8절에서 “정신을 차리고”라는 말을 2번 반복하는데, 밤에 속하여 취한 자들과 반대인 낮에 속한 자들은 술 취하지 않은 정신을 차린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거나 세상에 속한 것에 취해서 사는 상태와 정반대의 의미로 ‘어느 것에도 취하지 않은 명석한 상태’를 유지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니는 우는 사자 앞에 술에 취하여 삶의 목적이 먹고 마시는 것에 있는 사람은 마귀와의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경고해주시고 있습니다.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하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술에 취하지 않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2) 성도는 술뿐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에 취해서 살아서도 안 됩니다.
세상에서 다른 것에 취해 살아갈 때도 ‘우는 사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는 마귀’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두루 찾는 사단 마귀는 성도를 삼키기 위해서 술에 취한 자들만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마음과 생각이 영적인 전쟁을 하기에 합당한 상태로 유지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우리 대적 사탄 마귀는 성도로 하여금 술 뿐 아니라, 다른 것에 취하여 살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로 하여금 그 구원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도록 성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에 취하게 하고, 다른 것에 마음과 생각을 쏟게 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① 성도를 영적으로 취하게 만드는 강력한 독주는 물질이 될 수 있습니다.
재물이 주는 편리함과 안전감에 취하면, 성도는 하나님만을 인생의 유일한 피난처로 의지하지 않게 되고, 물질을 모으고 쌓는 재미에 취하여 영원한 하늘의 보화를 생각하지 않고, 세상 것에 취하여 살게 될 때에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는 마귀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② 또한 이 시대는 우리 대적 마귀가 성도들을 취하게 하는 것은 세속적인 미디어라는 독한 술이 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 온라인 게임을 하기 위하여 PC방에 갈 필요도 없습니다. 초등학생 손에도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어서 어디서나 원하기만 하면, 각종 온라인 게임과 자극적인 콘텐츠가 끊임없이 제공되어 사람의 뇌에 끊임없이 도파민을 주입하여 성도의 지성을 흐리고 주님과의 관계에서 깨어 있지 못하게 하여 맑은 정신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깊은 기도로 나아가 주와 함께 교제하는 시간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있어서 미디어 금식, 미디어 해독(디톡스)은 꼭 필요한데, 미디어를 접하는 시간을 정해야 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정하고 잘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무엇에 취하지 않고, 제 정신을 차린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미디어 속에 온갖 세상이 다 들어 있습니다. 사탄 마귀는 그 속에 은밀하게 인본주의, 물질만능주의, 음란한 가치관을 잔뜩 심어 놓았기에 이것에 접촉하는 성도의 영혼이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은밀하게 이런 사상을 주입하여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고, 세상 중심, 정욕중심의 삶을 살아가도록 부추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취하게 하는 모든 것에서 근신하고 제정신을 차려야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기뻐하시는 성도의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술 뿐 아니라, 세상의 물질과 세속적인 문화와 즐거움을 포함하여 그 무엇에 취하지 않고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성도의 모습은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과 은혜로 충만한 상태가 구원받은 성도가 제정신을 차린 상태입니다.
4. 사도 바울은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근신하라”는 내용을 고린도후서 7장 9절로 11절에서 “하나님이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 세상적인 문제로 인하여 근심하고 염려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다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방금 읽어드린 고린도후서 7장 10절 하반절에서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여기서 말씀하시는 “사망을 이루는 것”인 “세상 근심”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한 “염려”입니다. 반면에 바울 사도가 말씀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베드로 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근신하라”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는 “근신” 곧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든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 뜻대로 살기를 위해서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2)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구체적으로 11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한 이 근심’이 성도로 하여금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① 여기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라는 말은 이전에는 죄에 대해서 둔감했던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사도 바울의 책망을 받고서 이제는 죄를 범하면 안 되겠다는 간절한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에서 교회 안에 있는 음행의 문제에 대해서 책망하였고, 고린도전서 8장에서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서 그들을 책망하였습니다. 당시 그들은 영지주의 영향으로 음행과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하여 관대한 편이었는데, 사도가 그런 악에서 돌이켜야 한다고 책망할 때 과거 죄에 대해서 미지근하고 방관적이었던 성도들이 사도의 책망을 받고서 이제는 죄의 문제를 신속하고 진지하게 해결하려는 영적 열망과 다시는 이런 죄에 빠져서는 안 되겠다는 간절함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②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라는 말은 이제는 이 더러운 죄에 결코 동조하거나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변증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③ “얼마나 분하게 하며”라는 말은 죄를 범함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죄와 주님의 몸된 교회를 더럽혔다는 것에 대해서 거룩한 분노를 느끼고 발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④ “얼마나 두렵게 하며”라는 것은 과거에는 죄를 가볍게 여기던 영적 무감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회복된 것을 말씀합니다.
여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은 죄에 대해서 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죄로 인하여 당하게 될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늘 아버지께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늘 아버지께서 싫어하시는 일을 할까봐 떠는 두려움입니다.
⑤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라는 것은 자신의 잘못으로 아버지를 화나게 만든 아이가 아버지가 다시 웃으며 안아줄 때까지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는 것처럼, 참된 회개는 깊은 영적인 갈망을 낳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죄로 인해 멀어졌던 사도 바울과의 관계가 온전히 복원되기를 사모하였고, 무엇보다 주님의 친밀한 임재 안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기를 목마른 사슴처럼 사모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⑥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진리를 변호하며, 선한 일을 행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이 다시 불일 듯 일어난 상태를 뜻합니다.
⑦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라는 말씀은 죄의 문제를 대충 덮어두지 않고, 자신과 공동체 내에서 죄를 엄격히 징계하고 바로잡으려는 단호한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바울 사도에게 죄에 대하여 책망을 받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이제 죄를 과거처럼 여기면 안 되겠다는 각성을 하였고, 제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떠남으로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3) 이런 자세가 바로 근신하는 것입니다.
근신하는 성도 곧 세상 것에 취하지 않고 성도로서 마땅한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성도의 심령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사랑으로 충만한 상태가 제정신을 차린 상태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세상 것에 취하지 않고, 구원의 기쁨과 감격 속에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상태, 곧 제정신을 차린 성도가 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5. 오늘 본문 8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전투하는 교회를 향하여 사단 마귀를 대적하기 위하여 또한 “깨어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1) “근신하라”는 말씀이 ‘세상 것에 취하지 않은 상태’, ‘제정신을 차린 상태인 구원의 기쁨으로 무장된 상태’라면, “깨어라”는 말씀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 “깨어라”는 말은 헬라어로 ‘그레고레오’라는 단어인데 기본적인 의미는 ‘잠에서 깨다’는 말인데, 그 의미가 더 확장되어 ‘∼을 주시하다.’ 더 나아가 ‘∼을 경계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게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간절히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 26:40)라고 말씀하실 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가 오늘 본문의 “깨어라”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깨어라”는 말씀은 일차적으로 육체의 잠에서 깨는 것을 포함하여 영적인 잠에서 깨어 있는 상태를 말씀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근신하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보배 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는 물질과 세상에 취하지 않고 제정신을 차린 상태인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로 충만한 상태에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여기서 더 나아가 “깨어라”는 말씀처럼 성도는 영적으로 깨어 자신의 상황을 주시하고, 대적자 마귀를 경계하라는 것이 “깨어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2) 성도가 제정신을 차린 상태인 ‘근신’할 뿐 아니라, 이렇게 ‘깨어’ 자신을 상태를 주시하고 대적자 마귀를 경계해야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는 마귀의 계략에 넘어지지 않고, 마귀를 대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① 구약의 다니엘은 젊은 시절부터 노인이 되었을 때까지 근신하고 깨어서 살아간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바벨론 포로로 사로잡혀 갔으나, 포로된 땅에서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로 뜻을 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벨론이 망하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을 때에도 다니엘은 다리오 왕이 고관 120명을 세워 통치할 때 그들 위에 있는 세 명의 총리 중의 하나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 70년이 더 흐르고 나서 바벨론이 메대 바사에 의하여 망했을 때의 다니엘의 나이는 이미 80살이 넘은 노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시기하는 다른 총리들과 고관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발할 만한 부정한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서 근거를 찾지 못하면 고발 할 수 없는 줄 알고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하여 다리오 왕에게 나아가서 ‘앞으로 20일간 다리오 왕 외에 어떤 신에게도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조서를 내려달라’라고 다리오 왕을 설득하여 반포하게 하였으나, 깨어 있는 다니엘은 여전히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의 향한 창문을 열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일로 그는 사자 굴에 산채로 떨어졌으나, 하나님께서는 근신하여 제정신을 차리고 항상 기도로 깨어 있던 다니엘을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단 6:22)하심으로 다니엘은 어떤 상함도 당하지 않았습니다.
영적으로 제정신을 차린 상태인 근신하고, 자신과 주변을 늘 주시하고 경계함으로 깨어 있던 다니엘은 실제로 굶주린 사자들도 삼킬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자들로 하여금 다니엘을 삼키지 못하게 입을 봉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을 시기하여 다니엘을 참소하여 사자 굴에 던지도록 다리오 왕을 뒤에서 조종한 자들이 다리오 왕의 명령으로 사자 굴에 떨어질 때 “그들이 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사자들이 곧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도 부서뜨렸더라”(단 6:24)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② 또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에 이끌리어 40일간 광야에서 금식하셨으나, 그 40일간 금식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 속에서 사탄의 3가지 시험을 능히 이기실수 있으셨습니다.
40일 금식한 사람에게 금보다 귀한 것이 떡입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얼른 배고픔을 면하라고 유혹하는 육신의 정욕의 시험을 광야에서 40일간 깨어 기도하신 주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살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사탄의 첫 번째 시험을 이겨내셨습니다.
두 번째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당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증명하라는 안목의 정욕으로 시험하였으나, 깨어 기도하신 주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말씀으로 이겨내셨습니다.
세 번째로 천하만국을 보이며 한번만 자신에게 절하면 모든 것을 줄 것이라고 이생의 자랑으로 유혹하는 사탄의 시험에 깨어 기도하셨던 주님은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씀으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우리도 그 무엇에도 취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으로 충만한 상태로 제정신을 차린 상태인 근신하며, 또 나와 주변을 살피고 경계함으로 깨어 주님 안에 거할 때에 다니엘처럼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는 마귀에 삼킴을 당하지 않게 되고, 예수님처럼 마귀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6. 우리가 사탄 마귀를 대적해야 하는 이유는 8절 하반절에서 말씀하는 대로 사탄 마귀가 성도를 삼키려는 “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1) 여기 “대적”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안티디코스’라는 말로서 ‘고발자, 원수, 대적’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새미국표준성경(NASV)에서는 이 “대적”이라는 말을 ‘애드버세어리(adversary)’라고 번역하였는데, ‘적, 반대자, 반대편에 선자’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15절에서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빛과 어둠이 조화될 수 없듯이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조화되지 않습니다. 또한 성도와 마귀도 조화될 수 없는 적, 곧 반대편에 서로 서 있는 존재로서 마귀는 성도로 하여금 마땅한 바인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려고 반대편에서 역사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반대편에 선 자인 마귀와 어떤 경우에도 타협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세상의 정신과 원리는 타협을 강조하고 서로 한번씩 양보하는 중용의 도를 말합니다.
민사 사건으로 법정에 가면 판사는 일차적으로 합의를 종용합니다. 판결로 가는 것 보다 민사 사건에서 화해를 통한 합의로 재판하지 않고 소송을 마무리 하는 판사를 능력 있는 판사라고 말하고 고과점수도 높게 주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마귀와 세상과 더불어 타협할 것이 없습니다. 마귀는 타협과 대화와 합의의 대상이 아니라, 대적해야 할 원수입니다. 성도가 공중권세 잡은 마귀와 또한 그 마귀의 권세 아래서 종노릇하는 세상과 타협이나 합의나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은 하나님만이 오직 유일하신 한분 참된 신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교훈만 진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인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 마귀와 타협할 수 없으며 그 어떤 일도 같이 도모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마귀를 대적하지 않고, 마귀와 협상을 하거나 마귀를 따르는 세상 정신과 타협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참된 신앙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결단하는 것이며,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다니엘처럼 주를 위하여 마음을 정하고 뜻을 세우고 사는 자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기독교 외에는 구원이 없다. 더 정확하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말하는 소리를 제일로 싫어합니다. 그렇다고 성도가 그들 듣기 좋으라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마귀와 대적하는 것, 맞서는 것, 반대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또한 성도는 세상을 이해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뿐인 것입니다. 참된 성경적인 기독교 신앙은 세상과 타협이 아니라, 악한 세력과 악한 정신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대적하는 가운데 마귀를 이길 수 있고, 복음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그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7. 마귀를 대적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9절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믿음을 굳게 하여 대적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여기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라고 할 때 “굳건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스테리오스’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단단한, 바위 같은, 흔들리지 않는’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견고히 붙들고 그 말씀에서 조금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태도가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또 우리의 믿음을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을 굳건하게 한다는 것은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시고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며,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과 은혜 안에서 마귀를 대적하고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것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고난의 현실을 바라보기보다는 지금 당장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고 심령을 굳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들어가서 누리게 될 하늘 영광으로 충만할 때 마귀의 유혹과 시험을 능히 이기고 마귀를 대적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께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근신하고 깨어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답게 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삼키려 하는 대적 마귀의 유혹을 이기고, 믿음을 굳게하여 싸워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