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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안

말씀을 배우고 삶으로 나누는 자료입니다.

주일 낮예배 베드로전서 강론(34)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베드로전서 4장 1절로 4절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1.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5장 1절로 4절 말씀은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들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1) 이 말씀은 오늘 본문 앞에 기록된 베드로전서 4장 12절로 19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게 될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 바로 이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 필연적으로 불 시험과 같은 고난을 당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성도의 연단하기 위한 것이니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4장 17절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되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갈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심판이 성전에서 먼저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예가 있는데 바로 어린 사무엘이 섬긴 엘리 제사장 가문이 그러하였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여호와께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기 전에 솥에 삶지 않은 날 것을 가져다 먹음으로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엘리 제사장에게 보내시어 그 아들들의 죄에 대하여 경고하셨으나, 엘리 제사장은 자녀들의 악행을 교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일로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를 모시고 블레셋과의 전투에 나갔을 때, 그 날에 법궤는 빼앗겼고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었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게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그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그 소식을 듣고 진통하며 아들을 낳고 ‘이스라엘에서 영광이 떠났다’는 뜻인 ‘이가봇’이라고 아들의 이름을 짓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날에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일이 있었지만, 그러나 이 사건은 여호와의 심판이 성전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보여 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2) 그러나 17절에서 말씀하는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시작”된다는 말씀의 또 다른 의미를 앞 시간에 말씀을 드린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된다는 말씀이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심판과 징계로 나타나지만,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는 심판의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죄가 없음에도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을 하나님의 집에서 당하는 심판의 의미로 베드로 사도가 사용하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 주장을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소개된 핸드릭슨 패턴 주석의 베드로전후서를 주석한 20세기 영국의 가장 탁월한 신학자이자, 교부학의 최고 권위자인 켈리가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후서 1장 4절로 5절에서 “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 17절에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라고 말하면서 범죄하지 않았음에도 신앙의 연단을 위하여 불 시험을 당하는 것을 하나님의 집에서 당하는 심판의 긍정적인 의미로 베드로 사도가 사용하고 있다고 학자들이 설명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할 때가 되었는데,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시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지막은 어떠하겠느냐고 말씀한 후 ‘고난을 받는 자들은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하라’고 말씀하고서, 오늘 본문 1절에서 “너희 장로들에게 권하노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헬라어 성경에서는 5장 1절을 시작하면서 “장로들아”라고 부른 후 접속사 “그러므로”의 뜻을 가진 헬라어 “운”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영어성경 NASV에서는 “그러므로”라는 뜻의 단어인 “데어포어(Therefore)”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전서 5장 1절을 “그러므로”라고 시작함으로 이 말씀은 ‘세상을 정화하기 앞서 먼저 교회를 정화하는 하나님의 심판과 교회가 당하는 고난에 비춰볼 때’ 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런 막중한 시기에 이 땅에서 고난당하는 주님의 양떼를 목양하는 작은 목자인 장로들에게 주님의 양떼를 목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인가를 기억하라는 문맥 속에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2. 오늘 본문 1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 편지를 기록하던 그 시대에 교회의 장로들이 세워졌음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1) 그 증거가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라는 말씀입니다.

신약에서 교회의 창설직원인 사도 외에 다른 일꾼들이 있었는데, 장로와 감독과 목사와 교사와 집사의 직분입니다. 장로와 감독과 목사와 교사는 같은 직분을 부르는 다른 표현이라고 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청한 후 그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면서 28절에서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장로가 하는 일이 양 무리를 감독하는 역할과 교회를 보살피는 목자의 사역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스뷔테로스’라는 단어로서 단순히 ‘나이가 많은 노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 받는 어른’에 대한 호칭이었습니다.

‘감독’이라는 말은 ‘에피스코프’라는 말인데 ‘∼위에’라는 뜻의 ‘에피’와 ‘보는 사람, 파수꾼’이라는 뜻의 ‘스코프’라는 말의 합성입니다. 감독의 역할이 ‘양떼들을 지켜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 장로들에게 구체적으로 장로들이 감당해야 할 감독의 기능을 그 다음 구절인 29절로 31절에서 “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라고 말씀합니다.

감독으로서 해야 할 역할은 ‘사나운 이리가 교회에 들어와서 주님의 양떼를 아까지 않고, 제다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자들로부터 주님의 양떼를 감독하는 것’이 장로가 감당해야 할 감독의 역할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장로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주님의 양떼, 곧 성도들이 바른 길을 가면 더욱 격려하고 칭찬하는 역할을 해야 하고, 잘못된 길로 가면 그 곳으로 가면 안 된다고 지도하는 것이 장로가 맡은 감독의 역할이라는 말입니다. 그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신앙과 인격이 성숙하여 ‘존경 받는 교회 안의 어른’인 장로들이었습니다.

또한 장로들은 오늘 본문 2절에서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라고 말씀하시는 대로 장로는 목자, 곧 목사의 직임을 감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사도가 말씀한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 중에 현재까지 계속되는 교회의 항존직은 목사와 교사입니다.

여기 “목사”로 번역된 헬라어 ‘포이멘’은 양을 치는 ‘목자’을 말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목사는 주님의 양 떼를 목양하는 ‘목자’라는 말입니다. “목사와 교사”라는 말이 헬라어로 ‘투스 데 포이멘 카이 디다스칼로스’인데, ‘투스’라는 관사를 하나만 쓰고 목자(목사)와 교사를 연결했기에 헬라어 문법 그란빌 샤프의 법칙에 따라서 ‘목자(목사) 곧 교사’로도 읽을 수 있고, 헨디아스의 법칙을 따라서 ‘가르치는 목자(목사)’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양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목자(목사)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는 교사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장로 곧 감독과 목자(목사) 곧 교사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침으로 양떼에게 생명의 양식을 먹이고, 양 무리를 사나운 이리들인 이단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을 감당하는 사역자들이었고, 초대교회 장로와 감독과 목사와 교사는 교회 안에서 신앙과 인격이 성숙한 존경 받는 어른으로서 말씀으로 주님의 양떼를 먹이고 돌보는 일을 감당한 교회의 지도자를 일컫는 표현이었습니다.

이 교훈은 베드로 사도가 부활하신 주님께로부터 디베랴 호숫가에서 떡과 함께 숯불에 생선을 구워 주시면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3번 물으시고 베드로가 3번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할 때, 주님이 3번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 20:15), “내 양을 치라”(요 20:16), “내 양을 먹이라”(요 20:17)라고 말씀해 주신 것으로부터 나온 교훈입니다.

2) 우리 성도님들은 장로, 감독, 목사 곧 교사가 아님에도 함께 이 말씀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도들은 교회의 장로인 목자 곧 목사의 목양을 받아야 하며 이단으로부터 성도를 보호하고 감독하는 장로의 역할과 말씀으로 주님의 양떼를 먹이고 양육하는 교사로서의 장로의 역할이 담임목사와 또 함께 협력하는 장로님들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장로 곧 목자, 감독, 교사의 역할을 감당하는 목사와 장로님들의 섬김을 위해서 함께 기도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목사가 성경에 입각하여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 할 때는 그 말씀이 사람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인 줄 알고 단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순종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베드로 사도는 또한 오늘 본문 1절에서 자신을 그들과 같은 장로라고 겸손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1) 이 말씀은 지 교회의 지도자 곧 이단으로부터 성도들을 지켜야 하는 감독이요, 주님의 양떼를 말씀을 꼴로 먹어야하는 교사로서의 목자(목사)들 모두가 베드로와 같은 사도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신 일꾼으로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시고 교회를 설립하는 창설직원으로 세우신 사도였으나, 양 무리를 돌보는 일에 있어서는 지 교회의 장로들과 다를 바 없는 직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에서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표현을 가지고 교회의 장로는 사도와 같은 권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사리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2) 베드로 사도가 처음부터 겸손했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베드로는 무엇을 하던지 제자들 사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던 사람이었습니다. 공생애 기간이 다 지나가던 때 곧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속을 완성하러 올라가실 때만 하더라도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의 다음의 자리는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하고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권능을 받은 후에는 더 이상 다른 제자들과 경쟁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깨달음을 주실 때,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섬겼던 주님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사 죄인을 대신하여 구속을 이루신 그 사랑과 그 겸손하심을 온전히 깨닫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은 도덕적 미덕이나 성품의 한 종류로서 겸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부터가 겸손이었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로 오시어서, 죄인을 대신하여 율법의 수여자가 율법 아래 순종하시고, 무죄하신 참 사람이요,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대속의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시어 자신을 택한 백성의 대속의 제물로 내어주신 섬김과 겸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오순절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제자들에게 권능을 부어주실 때,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섬김과 겸손을 깨달은 베드로 사도는 이제 자신이 이 땅에서 높아지고 명예와 부를 얻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 오직 주님의 이름과 복음이 광포되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행 5:41)는 자가 되어, 주님께서 낮아지시고 섬기신 그 놀라운 사랑과 섬김을 본 받은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4) 그런 베드로가 이제 주님의 몸된 교회를 목양하는 장로 곧 말씀으로 주님의 양떼를 목양하는 장로인 목자들에게 ‘나도 여러분과 함께 장로 된 자로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없이 겸손해진 베드로 사도는 ‘나도 여러분과 같은 장로라는 말 한 마디로’ 지역 교회의 장로들에게 고난에 직면한 주님의 양무리을 바르게 목양하기 위해서는 장로 곧 목자(목사)들이 한 없이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영적으로 성장한 성화의 표지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과 겸손의 모습입니다.

4. 또한 오늘 본문 1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1) 헬라어 원문에는 ‘그리스도의 고난들의 증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난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고난들의 증인이라고 하였으니, 베드도 사도는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겪으신 모든 것이 고난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은 크게 두 가지 범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를 위하여 받으신 육체의 고난과 영혼의 고난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죄가 영혼과 육체 모두를 오염시켰기 때문에 죄인의 구속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도 육체와 영혼 두 방면에서 고난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육체의 고난은 예수님께서 사람이 몸을 입고서 당하신 모든 고난을 말합니다. 영혼의 고난은 제자들의 배신과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십자가 위에서 외면당하시고 버림받으신 영적인 단절의 고난을 말합니다.

둘째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통상적인 고난과 비상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통상적인 고난은 타락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일상적인 비참을 말합니다. 음식을 잡수시지 않으시면 배고픔을 느끼셔야 했고,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이 마르셨고, 열심히 걷고 일하시면 피곤함을 겪으셔야 하는 모든 고난 곧 죄로 인하여 우리가 당해야 하는 모든 통상적인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비상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 비상한 고난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당하신 고난과 죽으심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택한 백성 곧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지옥에서 당해야 하는 죄의 형벌을 대신 당하신 비상한 고난이었습니다.

2) 베드로 사도가 여기서 다시 그리스도의 고난들을 말씀하는 것은 앞서 여러 번 강조한대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함입니다.

교회는 무엇이고 성도는 누구입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탄생한 주님의 몸이요, 성도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어 모든 성도들이 고난과 고통이 없는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기 까지 성도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영적으로는 이미 임하였으나, 그러나 우리 눈에 보이게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영적으로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눈에 보이게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사이의 이 긴장 속에서 성도들이 이 땅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요, 성도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삶에 동참해야 하는 자들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고 성경은 줄기차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3) 앞에 베드로전서 2장 13절 이하의 말씀에서 성도들을 향하여 부당한 고난을 당할 때에도 슬픔을 참고 선을 행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성도가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부당한 고난을 대신 받으심으로 본을 끼치신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르는 삶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평신도 뿐 아니라, 장로들에게 권면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 곧 ‘그리스도의 고난들’에 대해서 사도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지켜야 하는 감독, 주님의 양떼를 주의 말씀으로 목양해야 하는 목자들에게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들’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4)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그 모든 고난들의 “증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증인”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마르튀스’라는 말인데, 그 뜻은 ‘목격자, 증인, 순교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은 30에 팔고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재판을 받으실 때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쫓다가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 때의 베드로는 ‘목격자, 증인, 순교자’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권능을 충만히 받은 후에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담대히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고, 매를 맞던지 감옥에 갇히던지 상관없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증거하고 가르치는 일을 쉬지 않았고,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행 5:41)였고, 결국에는 네로에 의하여 로마에서 순교로 주께 영광을 돌린 참된 예수님의 고난의 목격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대로 증거 하는 고난의 증인이요, 죄인을 대신하여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순교로 주께 영광을 돌린 순교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성도와 장로들도 그리스도의 고난을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주님의 양 무리를 섬기는 목회자와 장로님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항상 교회의 지도자들을 쓰러트림으로 영적 전쟁에서 손쉬운 승리를 거두려 합니다. 성도가 연약해지면, 교회 중직이 권면하고 세워줄 수 있습니다. 교회 중직자가 연약하여 넘어질 때에 목회자가 권면하고 위로하고 세워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넘어지면 누가 권면하고 세워줄 수 있겠습니까? 주 앞에서는 다 같은 성도요, 다 같은 주님의 자녀이나, 이 땅에서 목회자가 넘어지면 지 교회가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목회자를 위해서 더욱 기도로 섬기고 도와야 하겠습니다.

4. 오늘 본문 1절에서 베드로 사도가 자신을 소개하는 3번째 표현이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 여기서 말씀하시는 “나타날 영광”은 4절에서 말씀하는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 주실 영광을 말씀합니다.

이 영광은 베드로 사도 뿐 아니라, 함께 장로 된 자들도 참여할 영광이요, 고난 가운데서 기쁨으로 주님을 섬긴 성도들이 참여할 영광입니다. 이 영광에서 베드로 사도는 1장 7절과 13절 그리고 4장 13절에서도 가르치신 바가 있습니다.

“1: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찬송가 487장 4절에서 “고생한 후에 기쁨 있고 십자가 후에 영광 있고 죽음 온 후에 영생하니 이러한 도가 진리로다”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 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왕으로 통치하심으로 영광을 입으셨고, 다시 오심으로 산자와 죽은 자 모두의 심판 주로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도 이 땅에서는 고난이나, 수고와 고난은 잠깐의 순례길 동안뿐이요,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가 또한 모든 성도들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사실을 로마서 8장 17절로 18절에서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은 성경이 일관되게 가르쳐 주시는 핵심 교리중의 하나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도 주님 다시 오시는 날에 주를 위하여 부당한 고난을 기쁘게 받는 성도들을 영광에 참여하시게 하시고 수고한 것에 넘치도록 갚아주실 상급을 소망하시며 이 땅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셋째 하늘의 영광을 보고 온 사도 바울은 이 땅에서 주의 영광을 위해서 더 섬겨야 할지 아니면 세상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해야 할지 나는 무엇을 택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빌립보서 1장 23절로 24절에서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 사도의 소망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이었으나, 이 땅의 교회를 위해서는 육신으로 있는 것이 성도들에게는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 후에 과거의 자랑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의 영광에 눈을 뜨면, 곧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의 실체와 하늘에 누릴 영광을 온전히 깨닫기만 하면 세상 것을 하늘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3장의 천국비유의 말씀에서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천국 곧 예수님과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의 영광과 복락을 세상의 것으로 비유적으로 하신 말씀이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보화를 차지하기 위하여 그 사람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고 하십니다. 그 밭에 가장 귀중한 보화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더 활짝 열려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으면 죽고 못 사는 세상 것들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님을 깨달아 알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주실 그 영광은 밭에 감춰진 보화와 같은 것입니다.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 영광의 소망으로 충만하여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가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5. 오늘 본문 2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장로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1) “양 무리를 치되”라는 말씀에 ‘친다’는 말씀은 헬라어로 ‘포이마이노’라는 동사인데 ‘가축을 치다, 양을 치다’는 말입니다.

양을 친다, 목양한다는 말은 양떼를 그 생명의 꼴로 먹임으로 연약한 자의 심령을 강하게 하고, 심령이 병든 자를 고치며, 마음이 상한 자를 싸매 주며,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것입니다. 앞서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를 만나신 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3번 물이시고 베드로가 3번 모두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 주님께서 다시 3번 ‘내 어린 양을 치라(먹이라)’라고 말씀해 주신 대로, 양을 치는 것을 주님의 양떼에게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하고, 주님의 양떼들로 하여금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교훈하는 것이 주님의 양떼를 먹이는 목양의 사역입니다.


3) 이 목양의 사역을 감당할 때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양떼인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억지가 아닌 자원함으로 율법에 순종하셨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본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양떼를 목양하는 일 뿐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 모두가 주님을 섬기고 주님이 맡기신 일을 감당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억지가 아니라, 자원함으로 주님을 섬기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처음 뿐 아니라, 중간과 마지막까지 억지가 아닌, 자원함으로 주님을 섬기고 주님이 맡겨주신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합니다. 구원의 기쁨으로 처음에는 억지가 아닌 기쁨으로 자원하여 시작했으나, 은혜가 고갈되면, 억지가 되고, 자원함으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충만해야하고, 십자가를 우리에게 적용시켜 주시는 성령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로 충만해야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까지도 억지가 아닌 자원함으로 기쁘게 주님을 섬기고 주님 맡기신 일을 감당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6. 또한 오늘 본문 2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장로들을 향하여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더러운 이득”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아이스크로케르도스”라는 합성어인데, ‘부끄러운, 부정직한’의 뜻을 가진 ‘아이스크로스’와 ‘이득, 이윤’을 뜻하는 ‘케르도스’의 합성입니다. 그래서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한다는 말은 이 일을 행함으로 얻을 명예와 영광과 세상적인 가치를 따져 본다는 말입니다.

“기꺼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씨모스”인데, 그 뜻은 ‘열렬이, 기꺼이, 자원하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라는 말씀은 ‘부끄러운 이득 곧 탐욕으로 하지 말고 “기꺼이” 즉 열정적으로 자원하여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열망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억지가 아닌 자원함으로 행하는 것도 성령의 충만할 때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더러운 이득을 위해서가 아닌 기꺼이 열정적으로 목양하는 일도 역시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행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십자가의 복음의 영광으로 충만해야 하고 성령의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심령에 주시는 기쁨의 샘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를 의지하여 행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7. 오늘 본문 3절에서는 “맡은 자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 “주장하는 자세”는 이방의 지도자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0장 42절로 45절에서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대로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모습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경고하고 있는 “주장하는 자세”입니다.

2) 이렇게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라고 하십니다.


“양 무리의 본이 되”는 모습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본 받아서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모습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주와 선생이 되시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본을 우리가 본 받아야 합니다.

8. 이렇게 섬긴 자에게 오늘 본문 4절에서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않는 영광을 관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 10장 42절에서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주의 이름으로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한 것에 대하여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하신 주님께서 고난에도 불구하고 낙심하거나 뒤로 물러가지 않고, 주님이 고난을 당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신 은혜를 힘입어, 주님 나타나시는 날 영광에 참여할 소망을 가지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와 성령의 충만 가운데서 주시는 은혜와 자원하시는 심령 가운데, 억지가 아닌, 자원함으로, 더러운 이득이 아닌 즐거움으로 주장하는 자세가 아닌 주님이 섬겨주신 섬김의 본을 따라서 섬기는 자들에게 목자장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영광스런 재림의 날에 “시들지 않는 영광을 관을 얻”게 된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모든 사람이 꼭 그런 것은 아닐 수 있으나, 수고하며 뿌린 대로 거두는 은혜를 주시는 때입니다. 그러나 이 서신을 기록하던 초대교회 시대에는 고난과 핍박의 시대였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그 어떤 사랑의 수고와 주님을 위하여 부당한 고난을 기쁘게 받는다 하여도 아무런 상을 받을 수 없는 때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수고한 것에 대한 상급을 받지 못하는 고난의 때를 살아간다 하여도,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는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게 하신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물론 이 땅에서 주를 위하여 수고한 것에 대한 상급을 받는 것도 큰 기쁨이요, 은혜이나, 그러나 하늘에서 주실 상급은 이 땅에서 주시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런 상급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천국의 영원성에 비추어 보면, 이 땅에서는 시간은 정말 잠시 잠깐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4장 17절로 18절에서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이 땅에서 큰 고통을 일생동안 받는다하여도 하늘에서 누릴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그것을 잠시 받는 환난의 가벼운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떤 상을 받는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썩고, 더러워지고, 쇠해질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충성한 자들에게 주시는 상 곧 영광의 관은 영원토록 시들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시들지 않는다는 말은 영원토록 그 상급의 가치가 조금도 퇴색되지 않고 처음부터 영원무궁토록 그 영광이 계속된다는 말씀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한 자들에게 주시는 은혜와 상급이 썩지도 더럽지도 쇠하지도 않고 영원하다는 약속입니다. 이 소망을 인하여 고난 중에도 주님께 더욱 충성을 다하시는 저와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다 되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