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예배 교회 설립 50주년 주일 설교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
요한삼서 1절로 8절
“1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6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7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8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1. 오늘 본문에서 요한 사도는 자신을 장로라고 소개하면서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개인적으로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여호와께서 은혜를 베푸셨다’는 뜻이고 가이오의 이름의 뜻은 ‘기쁨을 주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된 요한 사도가 볼 때 영혼이 잘 되는 복을 받은 가이오는 요한 사도와 또 모든 성도들에게 그 자신의 이름과 같이 기쁨을 주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저와 여러분 모두도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성도로 견고히 서기를 소원합니다.
이 서신이 기록된 때는 9절 말씀을 보면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는데, 사도가 보낸 사역자를 디오드레베가 거절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의 정황을 생각해 볼 때 사도들의 직접적인 목양과 치리를 받던 때를 지나, 각 지역 교회가 조직화되고 틀을 잡아가던 1세기 말 대략 주후 90년을 전후한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가 가이오 개인에게 쓴 개인적인 서신이 정경이 된 것은 이 내용이 한 사람에게 국한된 내용이 아니라, 가이오에게 기록한 이 편지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듣고 배워야 할 중요한 진리를 닮고 있기 때문에 성령께서 66권의 정경에 포함되도록 역사하여 주신 것입니다.
1) 요한 사도는 가이오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을 사도라고 말하지 않고 ‘장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 ‘장로’라는 말은 헬라어 ‘프레스뷔테로스’라는 말로서 단순히 ‘연장자, 나이가 많은 노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교회에서 ‘존경 받는 어른’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단어인데, 맡은 일은 ‘설교와 가르침을 담당하는 목사와 교사’들을 칭하는 단어였습니다.
처음에는 장로와 감독이라는 칭호를 같이 사용했으나, 점차로 감독이라는 용어보다는 장로라는 용어로 통일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에 불러서 고별 설교를 할 때 28절에서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로가 하는 역할이 “감독”이라는 말입니다. 이 감독이라는 말은 헬라어 “에피스코프”인데 이 단어는 ‘∼위에’라는 뜻의 ‘에피’ 라는 말과 ‘보는 사람, 파수꾼’이라는 뜻은 ‘스코프’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서는 ‘위에서 보는 사람, 감독’이라는 뜻의 ‘오버시어(overseer)”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같은 지도자를 표현하는 말이지만 인격과 영적인 성숙을 이룬 사람이라는 의미에서는 ‘존경 받는 어른’이라는 뜻의 “장로”라고 부르고, 그리고 교회의 사역과 돌봄의 역할을 할 때는 “감독”이라고 불렀다는 말인데, 훗날에는 감독이라는 말보다 장로라는 말로 통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② 당시 요한 사도는 초대교회의 마지막 남은 사도요,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존경 받는 큰 어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장로인 나는”이라는 헬라어는 ‘호 프레스뷔테로스’인데, 정관사 ‘호’가 앞에 붙어서 ‘그 장로’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노년이 되었을 때 ‘그 장로’라고 말하면 1세기 후반의 모든 교회의 성도들은 ‘그 장로님’ 곧 그 어르신은 요한 사도 한 사람만 떠올리던 시대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베드로 사도와 바울 사도는 주후 64년에서 67년 사이에 로마에서 순교하였고, 남아 있던 다른 사도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 이 요한 사도를 교회사에서는 사랑의 사도라고 부릅니다.
이유는 그가 기록한 요한복음과 요한1.2.3서에서 성경 전체를 통틀어 사랑이라는 단어를 가장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구절인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을 필두로, 요한일서 4장 9절로 10절에서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라고 증거하였고, 요한복음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그 계명을 지켜야 할 것을 가르쳐주었고, 요한일서 3장 16절로 18절에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가르치고 이 교훈을 실천하는 사도였기에 사랑의 사도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얻은 것이었습니다.
3) 그러나 처음부터 요한 사도가 사랑의 사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형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께로부터 성격이 얼마나 급한지 ‘우뢰의 아들’이라는 뜻의 ‘보아너게’라는 별명을 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고자 할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기 마을로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자, 누가복음 9장 54절에 보면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라도 나이가 들면 노인이 되던지, 어른이 되든지 둘 중 하나가 된다고 말들을 합니다. 노인이 된다는 말은 그냥 나이만 먹는다는 말로서 신앙 인격이 성장하지 않은 사람들을 노인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어른은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성숙한 지도자를 말합니다. 사랑을 강조하고 사랑을 실천한 요한 사도는 초대교회 모든 성도들이 그 어르신이라고 인정하는 신앙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은 참된 “장로”였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모두 연세가 높아짐에 따라서 주님 안에서 신앙적으로 더욱 존경 받는 어른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교회 안에서와 가정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그리고 가정에서 자녀들을 진심으로 그들을 세워주고, 기도해 주고, 축복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질책하고 책망하고, 허물을 들추는 것은 쉽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질책하고 책망하고 허물을 들추어 망신을 주어야 신앙의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어른의 역할이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사랑으로 품어 주고, 격려해주고 축복해 줄 때 가정의 자녀와 교회의 성도들이 더 힘을 얻고, 믿음으로 세워지는 은혜를 주께서 주실 줄 믿습니다.
요한 사도는 나이만 먹은 노인이 아니라, 존경 받는 사랑의 사도, 가이오를 축복하고 격려하는 존경받는 어른 곧 장로님으로 불리는데 손색이 없는 초대교회의 어른이었습니다.
4) 그리스도 안에서는 나이와 크게 상관없이 아이들과 청년과 아비들이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 2장 12절로 13절에서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신앙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녀 곧 아이들이 있고, 청년이 있고, 아비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나이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정도를 따라서 부르는 말입니다.
자녀 곧 아이들아라고 부르면서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초신자를 부르는 표현이 자녀 곧 아이들아라는 표현입니다. 나이가 많아도 처음 예수님을 믿고 거듭날 때는 영적인 어린 아이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또 청년들아라고 부른 후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여 사단 마귀의 유혹을 구별하고 그 유혹을 이겨내는 성도,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을 부르는 표현 청년들아 입니다.
그리고 아비들아 라고 부르고서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인격적인 교제를 말합니다. 신앙이 원숙한 경지에 이른 성도의 하루하루의 삶을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혼의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내가 예수님을 믿은 햇수가 몇 년이 되었다고 신앙의 년 수만 자랑할 것이 아니라, 자녀와 성도들을 세워주고, 위해서 기도해 주고, 축복해주는 그리스도를 닮은 어른의 자리로 주의 은혜 속에서 나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오늘 본문 2절에서 요한 사도는 가이오를 위해서 축복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사도는 “사랑하는 자” 곧 하나님의 사랑과 사도 요한의 사랑은 입은 자인 가이오를 위하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한다고 말씀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1) 이 구절은 순복음 교회에서 소위 3중 축복, 또는 3박자 구원이라는 신학을 만들어낸 구절로서 순복음 교회가 이 성경구절을 붙들고 목회를 하여 그 교회가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순복음에서 말하는 3중 축복, 또는 3박자 구원의 첫 번째는 영혼의 복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고 영적으로 거듭나는 복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 복과 구원은 범사가 잘 되는 복이라고 말하는데, 가난과 저주가 물러가고 삶의 환경과 생업에 물질적 풍요가 임하는 복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믿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물질의 복을 누려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세 번째 복과 구원은 강건해지는 복이 하는데,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과 복은 오직 하나 죄인이 죄에서 구속함을 받아 구원을 받는 영혼의 복 밖에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기복주의 번영주의 신앙운동은 미국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믿고 꿈꾸고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성도가 부강하고 건강하기를 원하신다’는 메시지를 증거 함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사람들의 말로가 재정적인 파산과 질병으로 인하여 생을 마감한 사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신학이 바른 교리라면 절대로 그렇게 되면 않는 것입니다.
성경 한 구절만 가지고 중요한 교리체계를 세우면 안 됩니다. 만일 3박자 구원 3중 축복을 말하는 사람들의 견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영혼의 구원의 복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업이 잘되는 범사의 복도 있고, 병든 몸이 건강해지고 질병에 걸리지도 않는 건강의 복도 하나님이 주시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라면, 이 땅에 그리스도인들은 나머자 2가지의 복은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복이 영혼 구원과 함께 범사가 잘 되어 사업이 형통하는 것이라면, 이 땅에 최고의 부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이어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병원에 갈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2) 복음은 죄에서 구원하시는 영혼 구원의 복음 하나뿐입니다.
요한 사도가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 것에 대하여 개혁주의 입장의 학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석가 부르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혼이 잘 되는 영적인 안녕과 복이 건강과 일치하게 하여 주시어서 그 영혼의 복을 온전히 누리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간구’라는 의미로 해석하였습니다.
카렌 좁스도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이 구절은 번영의 복음을 말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물질적인 부유함과 신체적인 무병장수를 보장하는 보편적인 교리나 법적 창구서로 둔갑시키는 것을 심각한 성경 해석학적 왜곡이라고 말하면서, 가이오가 본문에서 말씀하는 영혼이 잘 되는 복, 곧 진리 안에서 행하는 일이었던 선한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이 잘되는 복을 주신 대로 그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일반은총의 복을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라고 주석하였습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구원은 죄에서 구원 하나만을 말씀하는 것이지 가난에서 부자가 되고, 병에서 놓여나 무병장수를 말씀하지 않습니다. 일찍 순교한 사도와 초대교회 복음 때문에 순교한 자들을 복을 받지 못한 자들로 만드는 해석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3)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디도서 2장 14절에서는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을 삼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말씀하는 선한 일은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성도 곧 그리스도를 닮은 성도가 되어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세상 가치관과 죄악에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성결한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과 복음의 전파를 위하여 수고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닮은 최고의 모습은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 되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부당한 고난을 당하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주심을 기뻐하는 삶입니다.
이 본질적인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는 내가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는 구원의 복을 받았으니, 사업도 잘되어 물질에 구애됨이 없이 원하는 형통한 삶을 살고, 오래도록 아프지도 않고 건강하게 살면서 자신이 원하는 세상의 영광을 누리는 삶을 산다는 세속적인 생각 곧 번영신학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3. 오늘 본문 3절로 4절에서 요한 사도는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하는 소식을 듣고 심히 기뻐한다고 말씀합니다.
“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1) 여기서 말씀하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일’은 2절에서 말씀한 ‘영혼이 잘되는 복’을 누리는 삶을 말씀합니다.
영혼이 잘 되는 복과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내용입니다. 영혼이 잘되는 것을 단순히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 칭의(稱義)의 구원을 받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잘되는 복은 예수님을 믿고 영혼의 구원을 받은 성도가 그 구원에 합당한 삶을 범사의 모든 일들 속에서 감당하는 삶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삶이 영혼이 잘되는 복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는 요한 사도가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소리를 듣고 기뻐한 것처럼,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주님이 명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2)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 왜 기뻐해야 할 일입니까?
① 사람이 성실하게 공부하고 노력하여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다 얻는다하여도 그 모든 것을 시간 속에서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썩어지고 더러워지고 쇠해지는 것’이기에 주님 다시 오실 때 다 불타 버리고 천국에서는 세상에서 무엇을 이루었고, 또 어떤 세상 영광을 누리는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 행한 일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토록 기억되고 상급을 받을 일입니다.
② 진리 안에서 행하는 일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주님은 그 상급을 잊지 않으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41절로 42절에서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2) 그러니 저와 여러분은 우리 자신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기뻐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진리를 행하는 것이 복된 것은 부모 된 저와 여러분이 먼저 진리 가운데 행할 때에 자녀들이 그 모습을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 교육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이 평안할 때나 때로 위기가 닥칠 때나 부모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믿음으로 이겨내는 모습을 자녀들은 말 없이 지켜보고 있는데, 그렇게 부모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살아갈 때 자녀들은 부모의 모습을 바라보며 산 교육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교회를 다닌 어떤 분이 성장하면서 영적인 방황이 시작되어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는지, 정말로 기도를 들으시는 주권자이신지 의심을 들 때에 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기도하고 주님만 의지하며 은혜 가운데 살아가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던 그 어머니, 현모양처이셨던 어머니가 주님과 동행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절대로 부인할 수 없었고 자신의 믿음없음을 회개하고 은혜를 구하여 훗날에는 신학을 공부하고 신실한 목회자가 되었다고 하시는 분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3) 부모가 먼저 영혼이 잘되는 복, 곧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지를 깨달을 때 자녀들이 이런 사람이 되기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으신 성도님들께서는 가정의 자녀들이 성실하게 공부하여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사회생활, 직장생활, 경제활동을 잘하여 재산을 축적하는 것만으로 기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세상에 속한 것이 부모에게 있어서 첫 번째 즐거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부모가 자녀에게 믿음의 문제는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믿음의 문제를 생각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계시다면, 자녀를 생명의 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 성경에서 말씀하는 좁은 길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가는 넓은 길로 인도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날이 있을 것인데, 이 땅에 남아 있는 자녀들이 믿음으로 견고히 서서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로 간다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런데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으나, 우리의 이 땅에 남은 자녀손들이 믿음에 별 관심이 없고 세상 정신과 영광에 충만하여, 내세와 천국와 영원한 영생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이 없는 자녀들이 있다면, 그 자녀들을 남겨두고 이 땅을 떠나 천국으로 가야하는 마음에 애통함이 없겠습니까?
4)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들이 믿음으로 서는 일 곧 영혼이 잘되어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들이 되는 일을 위해서 매일 같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부모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외적으로 잘 먹이고 입히고 뒷바라지 하여 공부시키고 취직 잘하여 가정을 꾸리는 것까지 도와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라, 자녀의 영혼이 잘 되고, 그 모든 범사의 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감당하고, 영적으로 강건한 자의 삶 곧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가 되도록 위해서 기도해주고 자녀를 그런 믿음으로 사람으로 세워주는 일을 했다면 이것이 부모로서 해야 할 가장 귀한 일을 감당한 것입니다.
정말 저와 우리 성도님들 모두 그리고 우리 성도님들의 자녀 손들이 모두 영혼이 잘 되는 복 곧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들 되게 하시기를 소원하고 그런 복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4. 오늘 본문 5절로 6절에서는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 일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6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가이오가 행한 진리 안에서 행한 일은 나그네 된 형제를 영접하고 대접하는 일이었습니다. 가이오가 영접한 나그네 된 자들이 누구인지를 7절에서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가이오가 영접하여 대접한 나그네는 당시 담임목회자가 없던 이방에 세워진 교회들을 사도의 명을 따라서 돌아다니며 주의 말씀을 증거하던 순회 전도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8절에서는 이들을 영접하는 것을 마땅한 일이며, 이런 순회 설교자를 영접하는 일이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누구든지 나그네 된 순회 전도자를 영접하여 그가 머무는 동안 숙소와 먹을 양식을 제공하는 자는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마태복음 10장 41절에서 주님께서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의미의 교훈을 요한 사도가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6절 하반절에서는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이는 순회 전도자들이 그들이 머물던 교회를 떠날 때 다음 선교지까지 가는데 필요한 먹을 것과 여비를 준비하여 전송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5. 오늘 우리는 교회 설립 50주년을 맞은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교훈을 받고, 우리의 신앙의 삶의 이정표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1)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은 것을 더 깊이 깨닫고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 사도는 가이오를 부를 때 “사랑하는 가이오”라고 부르는데, 여기 “사랑하는”이라는 말씀은 “아가페톤”이라는 말로서 ‘사랑을 받은, 사랑을 입은’이라는 형용사입니다.
가이오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곧 아가페의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 아가페의 사랑은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베풀어 진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자신의 전부를 내어 주신 자기희생적인 사랑이요, 우리에게 어떤 댓가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 사랑을 온전히 깨달을 때 우리는 영혼이 잘되는 복을 날마다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온전히 깨닫게 될 때에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가 늘 충만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을 받은 가이오는 그의 이름의 뜻이 ‘기쁨을 주는 자’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가이오가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기쁨을 주는 삶을 살아간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이 아가페의 사랑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늘 묵상하고 그 은혜 속에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핸드폰을 먼저, 찾고, 신문이나 TV를 찾는 자들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에 감사하시고, 그 사랑으로 충만하여 오늘 하루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 곧 영혼이 잘되는 복을 받은 자로서 진리를 따라서 살아가는 하루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함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2) 둘째로 우리는 영혼이 잘 되는 복을 더욱 누려야 하겠습니다.
영혼이 잘 되는 복은 성공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예수님을 믿고 영혼이 구원을 받는 칭의(稱義)의 구원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영혼이 잘 되는 복은 날마다 구원의 기쁨과 감격에 충만하여, 죄와 악을 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 거룩한 삶을 살아감으로 예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과 복음 전파를 위해서 내게 주신 직분과 사명을 감당하고, 또한 주님을 위해서 부당한 고난을 기쁘게 당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영혼이 잘되는 복이며, 진리를 위해서 행하는 삶입니다.
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께서 교회에 세워주신 설교자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 안에서 교제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현재 일부 전도회와 주일학교에서 낮 예배 때 들은 말씀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고 있는데, 모든 전도회와 주일학교와 각 구역에서 주님께서 주의 종으로 증거 하도록 하신 말씀을 다시 나누고 기도하는 일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렇게 할 때 서로에게 격려가 되고, 함께 진리의 말씀 안에서 자라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② 또한 내가 예수님의 보배 피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인 것을 확신하는 성도마다, 복음이 전파되고 증거 되는 일을 위해서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는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을 위해서 매일 1분이라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구원받은 성도마다 선교하는 선교사님들을 후원하는 일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작은 금액이라도 꼭 선교헌금에 동참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학생들도 부모님들께 받는 용돈 중에서 한 달에 천원이라도 선교헌금을 약정하고 복음 증거를 위해서 참여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③ 또한 노회 여전도회 연합회에서 우리교회가 함께 참여 하여 주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체적으로도 선교하는 일을 이미 하고 있으나, 형제가 연합하여 선한 일에 참여할 때 더욱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힘 있게 섬기게 하실 줄 믿습니다.
④ 무엇보다 자녀를 두신 부모가 되시는 성도님들은 내 가정의 자녀들이 영혼이 잘되는 복으로 충만한 자들이 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가정의 자녀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듭나서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며, 하루하루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며 진리를 더 배우고, 이 진리를 위해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는 일을 소원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영혼이 잘 되는 복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과의 관계에서 늘 은혜로 충만할 때 범사의 모든 일을 주의 영광을 위해서 행하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마음과 힘을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영혼이 잘 되는 일 곧 진리 안에서 행하는 선한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어서 우리 손으로 하는 일마다 형통케 하시고 우리의 육체에도 건강 주시기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케 되는 복을 진정으로 누리는 삶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물질의 복과 건강의 복을 간구할 때 주님께서 어디에 쓰려고 그것을 구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주의 형제 야고보는 ‘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것을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가장 귀한 복인 영혼이 잘되는 복을 받은 저와 여러분 모두는 이제 앞서 살펴 본 진리 안에서 행하는 일인 선할 삶, 심령에 십자가의 대속의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여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죄와 악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며, 계명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전파를 위해서 수고하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부당한 고난을 기쁘게 받으며 살아가는 자가 되도록 우리의 범사에 복을 주시고, 우리를 강건케 하여 주시어서 이 삶을 기쁨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