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예배 베드로전서 강론(33)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베드로전서 4장 14절로 19절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오늘도 본문이 본문 말씀을 살펴 볼 때에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잘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복인 줄 알고, 저와 여러분 모두가 고난의 때에 낙심이나 좌절이 아닌, 주님을 위해서 고난받게 하심을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1. 베드로 사도는 앞 구절인 베드로전서 4장 12절로 13절에서 성도를 연단하기 위하여 오는 불 시험을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1) 그리스도인이 불 시험 곧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해야 할 이유는 2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불 시험 곧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우리의 믿음이 더욱 정금과 같은 순결한 믿음이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그 믿음으로 무장되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될 때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재림의 날에 영광으로 갚아주실 것이기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였습니다.
2) 바울 사도도 베드로 사도와 같은 내용을 교훈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현재 당하는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으로 천국에서 갚아주실 것이라는 점을 로마서 8장 17절로 18절에서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이 아니라면 이 땅에서 고난을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들이 받아야 할 고난은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5절에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악한 죄들입니다. 이런 죄 말고도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라는 말의 헬라어의 뜻은 ‘남의 일을 감독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영어성경 킹제임스버전에서는 ‘남의 일로 바쁜 몸’이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라는 말씀은 ‘남의 일을 돌아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남의 일에 권한을 넘어서서 간섭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4)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일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주님과 같은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3장 14절로 17절에서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일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남의 일을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처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목숨을 우리의 죄를 대신할 대속물로 내어주시고 섬겨주셨으니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5) 13절로 16절에서는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3가지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앞 구절인 13절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오늘 본문 14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16절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이라는 표현입니다.
이 세 가지 고난은 모두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인데,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에 당하는 고난이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때 당하는 즉 죄가 없이 당하는 부당한 고난, 선을 행할 때 당하는 고난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이 고난만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2. 오늘 본문 14절 상반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는 것,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이유가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영광으로 갚아 주실 것이니 기뻐해야 할 뿐 아니라,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라고 하십니다.
1)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는 것 자체가 바로 복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0절로 11절에서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말씀하였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부활의 권능에 더 참여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성도의 삶에서 세상과 정욕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영적 죽음이 일어날 때에 비로소 부활하신 주님과 생명의 교제가 충만해지고 또한 주님 다시 오시는 날 부활의 몸을 입고 영광 가운데 거할 소망이 충만해지기에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를 더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닮아가게 되고, 주님 다시 오시는 날을 소망하게 되고, 그 날에 주실 상급과, 그날에 주님과 누릴 영적인 교제와 생명을 중심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는 것이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2)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치욕을 받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치욕을 당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육체적인 고난, 고통, 치욕, 수치를 당하였고, 심리적, 정신적, 영적으로도 고난, 고통, 치욕,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것만 고난과 고통과 수치와 치욕이 아닙니다. 성육신 자체가 고난, 고통, 치욕, 수치입니다. 창조주요, 통치의 주님께서 피조물인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어서 시간과 공간에 갇히신 삶을 사셨습니다.
음식을 드시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주무시지 않으시면 안 되는 몸을 입고 사신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속성에 어울리지 않는 일로서 그 모든 것이 예수님께는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육체적 고난 뿐 아니라, 심리적, 정신적, 영적인 고난이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죄인들에게 뺨을 맞으셨고, 침 뱉음을 당하셨고, 또한 죄로 가득한 당사 대제사장 안나스와 총독 빌라도와 분봉왕 헤롯에게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감히 피조물이요, 죄인에 불과한 악한 인생이 재판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의 아들을 심문하는 기가 막힌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요 19:10)라고 말할 때, 주님께서는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요 19:11)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빌라도에게 총독의 권세를 주신 위에 분은 로마 황제보다 더 높으신 주님 자신이셨습니다. 안나스와 빌라도와 헤롯 왕은 자신들이 감히 누구를 심판하는지도 모르고 분수에 넘을 악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죄인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달리셨을 때, 십자가 아래의 사람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하였고,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라고 예수님을 비난하고 조롱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으시는 그 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셔야 할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을 예수님께 쏟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얼굴을 돌리시는 사건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엘리 엘리 라바사박다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나님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으시는 가장 큰 영적인 고통을 인하여 부르짖으셨습니다.
성부께서는 영원 전에 성자를 낳으심으로 영원 전부터 연합과 일치 속에서 늘 생명의 교통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라는 말씀을 10장 38절. 14장 10절, 11절. 17장 21, 23절에서 다섯 번이나 말씀해 주심 같이 항상 연합과 생명의 교통 속에 거하시던 분이셨는데,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만큼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인하여 그 아들을 버리신 순간이었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신 심리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고난이었습니다.
이 모든 육체적인 고난과 영적인 고난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과 고통과 치욕과 수치입니다. 전혀 이런 고난과 치욕을 당하셔야 할 이유가 없으신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이 치욕을 당하셨습니다.
3. 그러면 오늘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어떤 고난을 받을 수 있고, 어떤 고난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1) 오늘도 전 세계적으로 핍박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으나,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 대한민국은 복음 때문에 외적인 핍박을 당하는 곳은 아닙니다.
오픈도어 선교회에서 1993년부터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 박해 지수를 발표했는데, 북한은 24년간 연속으로 세계 기독교 박해 지수 1위를 차지했습니다. 북한의 뒤를 따르는 나라가 소말리아, 예멘, 수단과 같은 나라들입니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발각되면 정치범 수용소에 장기간 구금을 당하게 되고, 고문을 받고, 가족은 연좌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북한의 성도들이 받는 고난이 없습니다.
또한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황제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지 않는다고 해서 직장을 잃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순교를 당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시대 신사참배 곧 동방요배를 거부했다고 주기철 목사님처럼 감옥에 갇혀 고생하다가 순교를 하는 시대도 아니고, 손양원 목사님처럼 1948년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좌익 학생들에 의해서 아들을 둘이나 잃고 본인은 2년 후인 6.25사변이 일어난 1950년 9월에 전쟁 중에 공산군에 의하여 순교를 하신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극심한 핍박을 받는 시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2) 그래서 어떤 분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일부러 뺨을 맞고 욕을 먹기 위해서 죄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를 한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용기는 가상하나 그런다고 그분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그들이 분노하여 뺨을 맞고, 욕을 먹을 수는 있겠으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정당한 고난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3)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떤 고난을 받을 수 있고, 또 어떤 고난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는 일입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를 힘쓰며, 또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고난일 수 있습니다.
먼저 온 맘과 몸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고 말씀을 통하여 은혜 받는 일을 위해서 준비하고 예비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은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킬 것이라고 하셨는데, 계명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라고 주신 직분을 잘 감당하는 것도 수고로운 일이며, 고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감당할 때 잘 하려면 끝도 없는 것이지만, 사람들의 눈가림만 하고자 한다면 할 것이 없는 것이 교회 직분이고, 교회 일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나, 그런 일이 오늘 우리에게는 고난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기도로 준비하고, 섬김에 일에 참여할 때 마음을 다하여 행하고, 또한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음으로 시간과 정성과 노력을 주의 일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 이 시대에 주님을 위한 고난이라면 고난일 것입니다. 구원의 주님을 이렇게 섬기는 것은 성도 개인에게는 영광이나, 주님께서는 이런 성도를 보시고 성도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힘써 수고하고 고난 받는 것으로 여겨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4. 오늘 본문 14절 하반절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는 자들에게’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신다고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1) 초대교회 성도들이 당했던 외적인 핍박과 고난, 오늘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남들 보다 더 헌신하고 충성할 때에 그런 성도의 심령에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그들 위에 계신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핍박의 현장에 선 성도의 심령에, 성령께서 내주하사 핍박을 이길 힘을 주시고, 믿음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은혜를 부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그리스도를 잘 섬기고, 맡겨주신 일에 충성하기 위하여 수고하는 것을 고난으로 여겨 주시고, 그런 자들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시니, 이것이 복이요, 기뻐할 일입니다.
2) 베드로 사도는 성령님을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해도 되는데, 왜 성령님을 “영광의 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성도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현재적으로 받는 고난과 주님을 섬기고 주님 맡기신 일을 잘 감당하기 원할 때, 현재의 고난과 어려움 너머에 있는 천국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하시는 영이시기 때문에 “영광의 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요, 또한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삶이 세상 사람들 눈에는 쓸모없는 일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장차 주님과 함께 누릴 영광을 바라보게 하시는 영이시니 “영광의 영”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가롯 유대의 배신으로 예수님께서 유대 군병들에게 잡히시고 대제사장 안나스와 총독 빌라도의 법정에서 심문을 받을 때 제자들은 다 도망치거나 예수님 곁을 떠나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에는 집에 들어가 안에서 문을 잠그고 두려움에 떨던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을 하였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사도행전 5장 41절에서는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고, 그 다음 절이 42절에서는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채찍에 맞고 불려 났는데, 그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을 뿐 아니라, 날마다 성전에서나 집에서는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숨어 지내던 자들이 어떻게 매를 맞고 옥에 갇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전에서나 집에서나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오늘 본문이 말씀하시는 고난 다음에 영광을 보게 하시는 “영광의 영”이신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영”께서 그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현재 받는 고난 너머에 있는 장차 주어질 영광에 눈을 뜨게 하셨기에 두려움 없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의 길을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4)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이 있을 것임을 마가복음 13장 11절에서 이미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고난의 현장에서 성령께서 함께 하사 복음을 증거하는 말을 하게 하실 뿐 아니라, 두려움 없이 그 모든 것을 이겨내는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가 평화의 때를 살고 있으나, 주님을 온전히 예배하고 섬기며, 주님 맡기신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수고하고 애를 쓸 때,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할 말을 주시는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은혜를 주시어 그 모든 일들을 잘 감당하도록 도우신다는 말씀입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기도와 헌신과 충성을 다하는 것이 복이요, 기쁨이나, 그 수고를 고난으로 여겨 주시고, 그 일을 능히 감당한 은혜를 부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의 영광과 전파를 위해서 수고하는 자들 편에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성도를 도우시고, 강하게 하시고, 끝까지 맡겨진 일에 충성하도록 “영광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낙심되고 피곤하며, 주님을 섬기는 일이 예전처럼 기쁘고 감격스럽지 않다면 나에게 “영광의 영”이신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대해서 주님을 예배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순종하여 주님을 섬기고, 주님께서 맡겨 주신 직분과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힘과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5. 오늘 본문 16절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고난을 받을 때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십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여기서 말씀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받는 고난’은 앞 구절인 15절에서 말씀하는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는 것과 정반대의 고난인 13절에서 말씀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이요, 14절에서 말씀하는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당하는 “치욕”과 같은 의미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인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1)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면서 당하는 고난을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보배 피로 구원을 받은 성도가 마땅히 당하여야 할 고난은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핍박의 때에는 고난과 박해를 당하는 일과 고난이 없는 때에 주님을 온전히 예배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기 위하여 살아갈 때 오는 어려움, 주님이 맡기신 직분과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시간과 마음과 물질로 헌신할 때 오는 모든 어려움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는 일입니다.
2) 여기서 말씀하시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이 신약 성경에서 3번 등장합니다.
① 맨 처음에는 사도행전 11장 25절로 26절에서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라는 말씀에서 가장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 칭호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붙여준 별명이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모든 삶이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붙여 준 별명인데, “그리스도인”이라는 헬라어가 ‘크리스티아노스’인데, 이 단어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크리스토스’와 ‘∼에 속한 사람, ∼의 추종자’라는 뜻의 ‘이아노스’의 합성어로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그리스도의 추종자’라는 뜻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삶의 모든 부분 곧 예배와 삶이 그리스도 중심이어서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 밖에 모르는 자들이라 비아냥을 담아서 부른 말입니다.
②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이 사도행전 26장 28절에서 사도 바울의 전도하는 말을 듣고 아그립바 왕이 사도 바울에게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아그립바 왕이 이 말을 한 것은 네가 나를 너처럼 예수를 위해서 사는 사람으로 만들려 하느냐 라는 비웃음의 말이었습니다.
③ 그리고 세 번째로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순종하는 사람,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긍정의 의미로 베드로 사도가 사용하고 있는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부끄럽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이스퀴노’라는 말인데, ‘부끄럽다, 수치스럽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구원을 주시는 그 복음에 합당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섬기면 당하는 고난도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비록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세상에서 핍박을 받고, 뺨을 맞고, 매를 맞고, 세상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를 받는다 해도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은 성도는 그 예수님을 위해서 당하는 모든 고난과 치욕과 고생은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3) 그래서 16절 하반절에서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전도를 하다가 억울한 매를 맞고 실라와 더불에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가 그 감옥에서 찬송하였는데, 이 모습이 바로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리는 모습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였습니까? “영광의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 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삶 곧 오늘날 우리가 몸과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고, 계명에 순종하며, 맡겨주신 직분을 잘 감당하기 원한다면,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늘 충만케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하며, 이 땅의 수고와 고난 너머에 있는 하늘의 영광을 보게 하시는 “영광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힘과 은혜로만 우리가 고난을 이기고 온전히 예배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명을 감당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6. 오늘 본문 17절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 당하는 이 고난이 심판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 여기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말씀은 에스겔 9장 6절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이 말씀 중에서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라는 말씀을 베드로 사도가 인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심판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내리는 저주와 형벌 하나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을 판단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여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 뜻대로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먼저 형벌로서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소 곧 교회로부터 시작하실 때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택하시어 구원하심으로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는 죽음의 심판을 내리지 말라는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시되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그에 걸맞은 형벌로서 심판을 행하시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그들의 의로운 행위에 걸맞은 판단을 하심으로 고난을 받으나 형벌을 면케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①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나 악을 행함으로 심판을 받은 사람은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엘리 제사장과 그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삼상 2:12)한 자들로서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삼상 2:17)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법궤를 모시고 나갔던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었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도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삼상 4:18)습니다. 이것이 성소에서부터 시작된 심판 중에서 형벌로서의 심판일 것입니다.
② 성소로부터 시작되는 심판 곧 교회로부터 시작된 심판의 두 번째 모습은 의인들을 고난으로서 온전케 하시는 긍정적인 의미의 심판 곧 판단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성도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 곧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들의 믿음을 금과 같이 단련하시고,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고, 또 하늘에서 주실 영광을 바라보고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는 것을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하나님께 형벌을 받는 것으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하게 하시는 과정으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은 불로 연단하는 것과 같이 혹독한 고난입니다. 불의 연단을 통하여 성도들은 정결케 되고, 죄를 제거되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거룩함을 이루어가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성도들의 고난을 정결케 하는 심판으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2) 이미 여러 번 강조하여 말씀드린 대로, 우리 죄에 대한 심판과 형벌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다 지나갔습니다.
죄가 하나도 없으신 참 사람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부당한 고난은 저와 여러분의 죄책을 담당하시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더 이상 어떤 저주와 형벌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7절에서 베드로 사도가 성도가 당하는 고난을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된 “심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대적하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 당하는 핍박과 주의 뜻대로 순종하기 원하는 자들이 당하는 어려움을 심판이라고 말씀하나 이 심판은 형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상급을 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게 하시는 고난의 의미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 곧 교회에서 시작된 이 심판은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저주와 형벌이 아닌, 그리스도를 위해서 성도들이 받는 부당한 고난을 말하는 것이데, 이것은 성도의 영광이요, 상급입니다.
3)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 곧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라는 말씀은 불신자들에게 매우 무섭고 두려운 심판만 있을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성부께서 흰 보좌에 심판주로 앉으실 그 때에 이들이 당한 마지막 심판의 모습을 성경은 2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이신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영원히 쫓겨나 바깥 어두운 곳 곧 빛이 상징하는 자비와 사랑과 은혜가 조금도 없는 암흑의 상태에 떨어져 영원토록 울면서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과 사랑이신 하나님과의 단절을 말씀하는 표현입니다.
둘째로 악인들은 오직 유일한 단 하나의 구원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지 않음으로 유일한 구원의 길을 떠난 자들이기에 그 어떤 자비와 긍휼도 없는 지옥 곧 불 못에서 불로서 영원토록 소금 치듯 하는 고통을 지옥의 불꽃 가운데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7. 오늘 본문 18절에서는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 이 말씀은 17절의 말씀을 보충해 주시고 설명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17절에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하”시는 일 곧 성도들로 고난 가운데서 믿음을 연단케 하시고,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고, 주의 영광을 위해서 수고하고 헌신하는 자들이 되게 하시는 것을 18절에서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또한 17절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라는 말씀을 18절에서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라는 말씀으로 설명해 주시고 있습니다.
2) 여기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에 “겨우”는 헬라어 ‘모리스’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겨우, 간신히, 드물게’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열심히 노력해야 겨우 구원을 얻게 된다는 부정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수많은 죄인들 모두가 아니라, 그 가운데서 ‘드물게’ 모든 자가 아닌 일부를 사랑 가운데서 선택하신 그들을 “하나님이 집에서 심판을 시작”하심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위하여 먼저 부당한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게 하심으로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고, 주를 위한 고난을 기쁨으로 받는 가운데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겨우”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후손 가운데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택하신 매우 소수에 불과한 자들 곧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을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시고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는 일인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도 기쁘게 받음으로 구원의 백성으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드러내 주시는 말씀입니다.
8. 그래서 오늘 본문 19절에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 먼저 성도가 당하는 모든 고난은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이라고 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사정을 모르셔서 또는 아셔도 사랑하지 않으셔서 모른 척 하시는 것도 아니고, 도와주시고 싶으신데 능력이 모자라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허락하시는 모든 “고난” 곧 우리에게 맡기신 직분과 사명을 감당할 때 오는 모든 수고와 어려움은 모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고난의 때에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내게 “영광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을 부어주시어서 모든 고난과 시험을 이기고 주의 뜻대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힘과 능력과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2) 둘째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성도들은 고난을 받는 중에도 “선을 행하”라고 하십니다.
앞서 16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이라는 말씀을 살펴 볼 때에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순종하는 사람,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긍정의 표현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정말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의 삶속에서도 “선을 행하”는 자들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에는 퇴근이 없고 휴일도 없으며 은퇴도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은 삶의 목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3) 셋째로 하나님의 뜻대로 선을 행하는 가운데 자기의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하라고 하십니다.
여기 “영혼”이라는 헬라어는 ‘푸쉬케’라는 단어인데, ‘영혼, 생명’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라고 읽을 수도 있고,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생명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라고도 읽을 수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선을 행하면서 낙심하지 말고 우리의 영혼과 생명을 창조주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구속주께 의탁하라고 해도 되는데, 창조주께 의탁하시라고 하시는 것을 창조하신 분이 그 영혼과 생명을 또한 지키시고 책임지시는 분인 것을 말씀하시고자 함입니다.
고난 중에도 선을 행하다가 순교를 하게 되면, 창조주께서 그의 영혼을 받아주시어 천국에서 세상의 모든 수고를 쉬고 안식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성도가 고난 중에도 선을 행할 때 창조주께 그 생명을 의탁하게 되면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실 줄 믿고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선을 행하다 고난을 받아도 결코 망하거나 죽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또 여기 하나님께서 “미쁘시다”는 말은 헬라어오 ‘피스토스’인데, ‘충성된, 진실한, 신실한’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미쁘시다”고 할 때는 2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님의 ‘변치 않으심’과 ‘전능하심’을 함께 표현하는 말이 하나님은 “미쁘시다”는 말입니다.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도, 죄인을 향하여 아들을 대속의 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으십니다. 그 구원의 계획과 사랑을 이루실 능력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도 조금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니 고난 중에서 선을 행함으로 변치 않으시고 전능하신 참으로 신뢰할 만한 창조주께 우리의 영혼과 생명을 의탁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되 죄를 짓고 남의 일을 간섭함으로 고난을 받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 곧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고,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을 일 곧 핍박이 없는 평화의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온전히 예배하고, 그 뜻에 순종하며, 맡겨주신 직분과 소명을 감당할 때 찾아오는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기쁨으로 이겨내며, 눈물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들에게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미쁘심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