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예배 베드로전서 강론(32)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베드로전서 4장 12절로 13절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도 주의 말씀을 살펴볼 때에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잘 깨닫게 하시어서 본문이 말씀하는 바 우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않고 우리의 시험당함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임을 깨닫고 즐거워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1. 베드로 사도는 이미 1장, 2장, 3장에서 고난의 문제를 말씀해 주셨는데, 오늘 본문에서 다시 고난의 문제를 다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 베드로전서 1장 6절로 7절에서 시험과 고난을 통하여 성도의 믿음이 불로 연단한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이 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허락하시는 고난은 우연도 아니고, 무의미한 비극도 아닙니다. 믿음이 고난과 시험을 통함으로 불로 연단한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갖게 하심으로 고난은 잠깐이지만, 그 믿음을 따라서 행한 자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날 주어질 칭찬과 영광과 존귀는 영원하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2) 베드로전서 2장 19절로 21절에서는 성도가 이 땅에서 잘못이 없음에도 당하는 고난인 부당한 고난을 당하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를 위하여 부당한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복된 일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세상 사람들은 잘못을 행하고도 고난을 받을 때 자신이 행한 잘못보다 더 큰 징계와 보복을 받는다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 억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당하는 부당한 고난은 그리스도의 제자이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인데, 죄가 하나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저와 여러분의 죄의 책임을 해결하시기 위하여 죄가 없으신 참 사람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무죄하시고 거룩하신 분이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부당한 고난은 우리를 위하여 부당한 고난을 먼저 받으심으로 본을 끼치신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오게 하시려고 허락하시는 고난입니다. 그래서 때로 잘못이 없고, 도리어 복음을 증거 하는 선한 일을 행함에도 부당한 고난을 당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3) 베드로전서 3장 14절과 17절에서는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4절에서 말씀하는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 17절에서 말씀하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입니다. 의를 위한 고난 곧 선을 행하다 고난 받는 것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어서 베드로전서 3장 18절 이하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나, 영으로 살리심을 받은 후에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서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분께 복종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심으로 성도 곧 우리가 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고,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삶의 결국은 그리스도와 같이 높아지고 천국에서 상급을 받게될 것이란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4) 그리고 베드로전서 4장에 이르러서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는데, 우리도 주님을 위해서 죄의 즐거움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받겠다는 마음으로 갑옷을 삼을 때, 죄를 그치는 일 곧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어 육체의 남은 때를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게 된다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말씀들로 고난에 대한 교훈은 다 말했다고 생각이 들 만도 한데, 오늘 본문 12절로 19절에서 다시 베드로 사도는 고난의 문제를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2.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여러 번 고난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 아니 지상의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의 삶은 고난과 뗄 수 없는 것이기에 고난의 문제를 거듭거듭 강조하여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1) 성도가 이 땅에서 고난을 피할 수 없다고 하시는 이 말씀들은 바다를 항해하는 뱃사람들에게 등대와 같은 말씀입니다.
태양이 환하게 비치는 낮 시간에는 지도와 나침판과 육지의 해안선을 바라보면서 항해하는데 조금도 불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길은 항상 태양 빛이 환하게 비치는 한 낮과 같은 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만나게 되면 등대의 불빛 이외에는 배가 나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고난과 박해와 부당한 고난을 당할 때 사도가 말씀해 주시는 고난에 대한 이 교훈들을 등대의 불빛으로 삼아 어두운 고난의 때를 이겨 나가야 할 것입니다.
2) 사도가 가르치는 고난에 대한 말씀과 반대되는 것이 성공주의와 번영주의 신학입니다.
오늘날 성공주의 신학과 번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믿음으로 꿈꾸고 소망하고 바라고 말로 선포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다 이루어 주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성경의 일부만 받아들인 부분적인 견해일 뿐입니다. 성경 전체에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공주의와 번영주의 신학 운동의 하나인 ‘믿음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던 케네스 하긴은 ‘믿음은 영적 법칙처럼 작동한다.’라고 말하면서 ‘믿음으로 말하면 현실이 바뀌고, 믿음의 고백이 결과를 만든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대표 구호가 ‘말하라, 믿으라, 받으라.’였습니다. 그러나 참 믿음은 하나님과 그 분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이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줄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의 정의는 아닙니다. 참 믿음의 대상은 언약으로 그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이 성도의 유일한 믿음의 대상이지,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바를 믿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의 대상도 바른 믿음의 내용도 아닙니다.
성공주의와 번영주의 신학의 문을 연 이 사람은 노년이 되자, ‘질병 없는 삶’을 강조한 자신의 신학과 달리 심혈관 문제, 신체 쇠약, 건강악화로 고생하다가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또한 이 사람의 영향을 받은 사람 중에서 ‘하나님은 당신이 건강하고 부유하길 원하신다.’는 메시지를 널리 전한 또 다른 사람인 오럴 로버츠도 그의 아들이 젊어서 죽고, 재정적인 논란과 사역 말기에 여러 위기를 경험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에 널리 알려진 빈야드 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존 윔버는 성령의 은사와 치유 사역을 강조함으로 십자가의 복음보다 체험을 앞세움으로 신앙의 우선순위를 잘못 가르쳤는데, 그는 평생 치유 사역을 강조했지만, 정작 자신은 암에 걸렸고, 뇌출혈 합병증으로 60세 초반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고난이 없을 때에 성공주의와 번영주의 신학은 성도에게 소망과 위로가 가득한 꿀단지처럼 달게 느껴지는 말들입니다. ‘믿음으로 말하면 현실이 바뀌고 믿음의 고백이 결과를 만든다. 하나님은 내가 항상 건강하고 부유하기를 원하신다.’라는 말들은 인생의 고난을 물리치는 최고의 해결책처럼 여겨집니다.
이런 주장은 팍팍한 삶의 문제에 실제적인 해답을 주는 것 같아서 많은 사람들이 성공주의 번영주의 설교에 열광하며 몰려듭니다. 그러나 방금 말씀드린 대로 성공주의와 번영주의 신학을 외친 사람들의 삶에도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치유 사역을 강조한 사람들이 오히려 질병으로 생을 마감함으로 성공주의와 번영주의 그리고 은사주의가 바른 신학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을 뿐입니다.
3) 성도의 인생에는 반드시 고난의 때가 찾아옵니다.
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고난이 반드시 찾아온다고 아주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8절로 20절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요한복음 16장 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7장 14절로 16절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미움과 환난과 박해를 당하는 이유는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고난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② 사도 바울도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로마서 8장 17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빌립보서 1장 29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디모데후서 3장 12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3. 오늘 본문 12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면서 성도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당할 때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 일반적으로 이 세상 사람들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을 말합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칭찬하고 상을 주어서 선한 일을 장려하고, 악을 행한 자에게는 벌을 주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행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정부가 해야 할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권선징악(勸善懲惡), 또는 상선벌악(賞善罰惡)입니다.
이런 일반적인 원리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전혀 맞지 않습니다. 죄를 지은 것이 아니요, 도리어 의와 선을 행하였는데 고난이 찾아오고, 생명을 살리는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였는데 박해를 당하니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만물과 인생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만왕의 왕으로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선과 의를 행함에도 고난을 당하니 정말 세상의 기준으로는 이상한 일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 12절에서 말씀해 주시는 대로 성도들이 당하는 시련이 얼마나 큰지 “불 시험”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였음에도 작은 고난이나, 작은 시련이 아니라, “불 시험”을 당한다고 하시니 정말 이상한 일처럼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베드로 사도는 성도가 선과 의를 행하고, 복음을 증거함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함에도 “불 시험”을 당하는 일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4. 성도가 당하는 “불 시험” 당하는 일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두 가지인데, 첫째로 “불 시험”은 성도의 믿음을 연단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앞서 “불 시험”이 외적으로 ‘너무나 큰 시련과 고난으로 고통을 당하여 모든 것이 다 타버려 소망도 끊어지고, 삶의 의욕도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기에 “불 시험”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불 시험”을 통하여 성도에게 주시는 유익이 있기 때문에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1) 첫째로 이 “불 시험”은 성도들의 믿음을 연단하여 정금과 같은 믿음으로 갖게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불”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퓨로시스’인데, 불로 금과 은을 제련하는 도가니와 풀무를 연상시키는 말입니다.
잠언 17장 3절에서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금을 연단하는 “풀무”라는 말을 70인역에서는 ‘퓨로시스’라는 단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이미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1장 7절에서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찬송가 450장 3절에서 ‘불같은 시험 많으나 겁내지 맙시다. 구주의 권능 크시니 이기고 남겠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도에게 찾아오는 불같은 시험은 시험의 고통과 심각성도 말하지만, 동시에 불로 모든 불순물을 태워서 우리의 믿음을 깨끗하고 정결한 믿음이 되게 한다는 의미를 담아서 베드로 사도는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이라고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도가니가 은을 제련하고 풀무가 금을 단련하여 불순물을 제거함으로 순은과 순금을 만들어 내듯이 “불 시험”은 성도의 믿음을 제련하고 단련하여 순결하고 견고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2) 욥이 이 불같은 시험으로 정금과 같은 믿음으로 더욱 새롭게 되었습니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욥의 고난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경건한 욥을 사탄 마귀에게 자랑하실 때 사탄 마귀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욥의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시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소유물을 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할 것이라고 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소유물을 사탄의 손에 맡기시고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하심으로 시작된 고난이었습니다.
욥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가운데서 욥기 23장 10절에서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욥으로 하여금 이유를 알지 못하는 고난을 당하게 하심으로 풀무에서 그의 믿음을 단련하심으로 순금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셨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선 욥은 욥기 42장 5절에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순금과 같이 단련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3) 야곱의 아들 요셉도 고난으로 온전케 되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 이야기를 형제들에게 할 때 미움을 받았고, 형들에게 의하여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20에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충성을 다하였으나,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요셉은 고난 때문에 그의 인격이 파탄나지 않았고, 그의 영혼이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그런 시련과 고난의 풀무를 통하여 그를 애굽의 총리로 세우실 때에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높여 주신 이유를 온전히 깨닫고 고통 속에서 보낸 억울한 세월에 대해서 형들에게 복수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자신의 신분을 형들에게 밝히며 창세기 45장 5절에서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라고 위로하였습니다. 그 후 그들의 아버지 요셉이 죽은 후 창세기 50장에서 형들이 다시 요셉을 찾아와서 용서를 구할 때 19절로 21절에서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원수를 갚는 대신에 도리어 더욱 하나님만 경외함으로 형제와 조카들의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양육하는 자 신약의 표현으로 하면 교회를 보호하는 통로와 방편으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4) 시편 119편 71절에서 고난이 유익이요, 고난으로 주의 율례를 배웠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여기 “고난 당하다”는 말이 히브리어오 ‘우네티’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압박하다. 누르다. 괴롭히다’라는 뜻입니다.
사탄의 공격이나 세상의 핍박으로 인하여 사람이 바닥까지 낮아진 것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사람이 철저히 낮아져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향하여 시선을 고정할 때,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을 통한 낮아짐을 통하여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주의 율례”는 ‘주의 율법’ 또는 ‘주의 언약’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고난을 통과하며 자아가 낮아질 때, 하나님께서 그 언약으로 그 백성을 구원하시는 진리를 더 깨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으로 당신의 백성과 자녀들을 깨우시고, 가르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고난의 때에 믿음 없는 자들처럼 원망하고 불평하며 낙망과 좌절할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가르치시는 주님의 율례 곧 언약의 말씀을 영혼의 골수에 새기게 하시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라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5. 성도가 당하는 “불 시험” 당하는 일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하는 두 번째 이유를 13절에서는 그 “불 시험”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 성도가 “불 시험”을 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고 하시는데, 여기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무엇입니까?
여기 “고난”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팟데마’라는 명사인데, 그 뜻은 ‘고통’을 말하고, 동사형으로는 ‘파스코’인데, ‘경험하다. 겪다. 고생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어떤 특정한 사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겪으신 모든 것이 고난이고 고생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으로서 아담의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기에 고난과 고통을 피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창조주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 고난입니다. 율법의 수여자가 율법 아래 나신 것이 고난입니다. 율법 아래서 성장하시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고난이었습니다.
조직신학자 루이스 뻘코프는 예수님의 고난을 말하면서 인간이 죄로 인하여 당해야 하는 고난인 피로, 배고픔, 가난, 삶의 결핍, 사탄의 유혹, 사람들에게 당하는 미움과 배척, 오해 등등 이 모든 통상적인 고난을 당하였는데, 이 모든 것은 죄로 인하여 우리가 당해야 하는 통상적인 고난인데, 구속주요, 중보자로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당하신 고난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통상적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우리를 위한 완전한 순종을 이루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당하신 최후의 고난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충분한 대속을 완성하여 주셨습니다.
2) 우리가 당하는 “불 시험” 곧 선과 의를 행함으로 당하는 고난, 고난의 이유가 우리의 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증거하는 선한 일을 행함에도 당하는 부당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기 “참여”라는 말이 헬라어로 ‘코이노네오’라는 동사인데, 그 뜻은 ‘공유하다. 나눠 갖다’입니다. 이 단어의 명사형이 ‘교제’를 뜻하는 ‘코이노니아’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 한다는 말은 우리를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우리가 공유하고 나눠 갖는 것이며,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고난과 교제하고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과 사귀는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부당한 고난 곧 불같은 시험을 당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공유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눠 갖는 것이요, 나를 위해서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의 고난과 교제하고 그 고난과 사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도의 성숙한 성도의 모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깨달은 성도는 우리에게 찾아오는 부당한 고난 곧 불같은 시험이 찾아올 때, 하나님을 향하여 왜 저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까?라고 불평하지 말고, 주님이 나를 위해서 받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은혜를 주시니 감사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충만을 받은 사도들이 그러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과 능욕 받는 일에 자신들이 합한 자요, 또 능욕 받음을 기뻐했다고 사도행전 5장 41절에서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는 나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며, 우리를 위해서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귀하게 여김으로 그 고난과 교제하는 삶, 그 고난을 친구처럼 여김으로 고난과 사귀는 삶인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공유하고 나눠 갖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소원합니다.
6. 오늘 본문 13절에서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즐거워하고 기뻐하게”하실 것이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 주께서 영광을 나타내시는 날 우리는 구원의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 할 일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곧 주님 다시 오시는 그 영광의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 기쁨은 나를 위해서 고난 받으신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가 구원의 주님을 뵐 것을 인한 기쁨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주님, 나를 사랑하신 주님을 만나뵐 것에 대한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이 날에 있기를 소원합니다. 세상이 즐겁고 행복해 보여도 하늘에서 누릴 즐거움과 기쁨에는 비길 수 없으며, 세상의 기쁨은 잠시 있다가 다 지나가 버리는 것이나, 하늘의 즐거움과 기쁨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의 주님을 만나게 될 영광의 재림의 날은 한량없는 기쁨과 즐거움의 날이 될 것입니다.
2) 또한 그 날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자들에게 주님은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이기에 즐거움과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신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곧 그리스도의 고난과 교제하는 삶,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공유하고 나눠 갖는 것이 당연함에도 주님은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진리를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서는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자들에게 영광을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이 땅에서 더욱 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7. 베드로 사도는 장차 당할 고난을 앞든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 여기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말씀은 헬리어로 ‘아케페토이’라는 형용사로서 ‘사랑을 입은 자’, ‘사랑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성도들은 누구의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까? 성도들 모두는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앞 시간에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의 사랑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신 무조건적인 사랑이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의 사랑은 죄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자기희생적인 사랑이며,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인 이 아가페의 사랑은 받으려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값없이 내어 주신 사랑이었습니다.
2) 베드로 사도가 이 편지를 받는 성도들을 향하여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단순하게 기록된 미사여구는 하나도 없습니다.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도는 네로 황제의 핍박의 바람이 불고있는 그쯤에 이 땅에서 성도들은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면서 그 고난을 이기는 것은 성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인 것을 온전히 깨닫는데서 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신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죄인 괴수인 나를 위하여 주님께서 자신을 내어주신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먼저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사랑을 받으시고 나중에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값없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시어 일방적으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 사랑을 인하여 죄 사함을 받았고, 의롭다하심을 입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차 주님 다시 오시는 날, 또한 주께서 우리를 이 땅에서 부르시는 날 우리는 주님의 임재의 영광 앞에 서서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주시는 충만한 은혜 속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죄가 하나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부당한 고난을 당하시고 완전한 순종과 충분한 대속을 제공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신 은혜를 깨닫고 우리도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기쁨으로 참여하는 자들, 곧 선과 의를 행하면서 당하는 고난인 불 시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성숙한 주의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 1장 2절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는 불같은 시험은 그리스도이 고난에 참여하는 영광스런 일입니다. 이 말씀을 필립스 영어 성경에서는 “나의 형제들아, 온갖 시련과 유혹이 너희 삶에 밀려올 때, 그것들을 무단 침입자처럼 원망하지 말고 친구처럼 환영하라”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서 말씀하시는 우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이 “불 시험” 곧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하는 이 부당한 고난, 선과 의를 행할 때 당하는 고난을 “온전히 기쁘게 여”김으로 고난과 시험을 “친구처럼 환영하”며, 그리스도의 고난과 교제하는 삶,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공유하고 나눠 갖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이런 성도는 주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주시고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