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AT JOONGSIM

강의안

말씀을 배우고 삶으로 나누는 자료입니다.

주일 낮예배 베드로전서 강론(31)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베드로전서 4장 9절로 11절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으니라 아멘”

1.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고 이 땅의 역사는 무한정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1) 주님의 재림의 때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파멸과 멸망의 날, 모든 것이 허무로 돌아가는 세상이 망하는 날이 아니라, 악에 대한 공의의 심판과 택한 백성을 구원하심으로 이 땅에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계시록 22장 13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파와 오메가”시라는 말은 모든 존재와 진리의 시작과 끝을 계획하시고 주관하시는 분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며, “처음과 마지막”되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창조와 인간의 모든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말씀이고, “시작과 마침”이 되신다는 뜻은 그리스도께서 세상 만물과 인생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창조하신 이 땅의 목적이 다하는 날인 택한 백성 모두가 구원을 받는 날이 이를 때에 그리스도께서 이 땅의 역사를 종결하시고 마지막으로 문을 닫으시는 완성자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은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모두 완성됨으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택한 백성을 구원하심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되,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낡아지고 타락한 이 세상도 새롭게 하시는 때로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우리에게 주시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종말을 대종말이라고 하는데, 이 대종말 뿐 아니라, 성도 개인의 죽음으로 맞이하게 되는 개인의 종말 곧 소종말도 성도들을 항상 생각하면서, 오늘이 나에게 허락하신 지상에서 마지막 날일 수 있다는 자세로 살아가는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온 이 ‘말세’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은 베드로 사도가 권고하시는 대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고 주시는 힘과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2) 오늘 말씀도 계속되는 문맥 속에서 주시는 말씀으로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주시는 힘과 은혜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삶의 실제적인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성도, 곧 그 ‘사랑’으로 “허다한 죄를 덮”는 삶의 내용은 9절 말씀대로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는 것이며, 10절의 말씀처럼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는 것이며, 11절의 말씀과 같이 모든 섬김 곧 주님을 섬기고 성도를 섬기는 일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감당함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 볼 때에 성령 하나님께 이 말씀을 잘 깨닫게 하시고 깨달은 말씀대로 살아가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2. 먼저 오늘 본문 9절에서는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는 말씀은 초대교회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1) 원망 없이 대접해야 할 대상은 일차적으로 ‘순회 설교자’, 또는 ‘순회 전도자’들이었습니다.

목회자가 귀하던 시절 순회 설교자들이 교회를 찾아 올 때 그들을 맞이하고 잠을 잘 곳과 먹을 양식을 제공해야 했습니다. 그 시대는 오늘 날처럼 담임 목회자가 한 교회를 맡아서 섬기는 제도가 정착되기 이전이었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한 후 다른 곳으로 가서 또 복음을 전해야 했기에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없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바울의 경우에도 한 곳에서 가장 오래 머문 곳이 에베소였는데, 그곳에서 3년을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쳤고, 고린도에서는 1년 6개월을 목회를 하고 다른 곳으로 또 이동하였고, 가장 짧게는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핍박을 인하여 3 이레 만에 떠나야 했습니다.

그 후에는 사도들이 세운 설교자들이 각 교회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시대에 로마와 같이 큰 도시가 아니라면 여행객을 맞이할 숙소도 없었고, 숙식을 해결할 곳이 있다고 해도 스스로 그 경비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지역의 교회에 순회 설교자가 찾아 가면 성도들 중에서 누군가를 그를 맞이하여 숙식을 제공해야 했습니다. 경제 사정이 어려운 초대교회, 핍박에 직면한 교회와 성도의 가정에서 순회 설교자가 찾아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기에 한편으로 기쁘고 감사한 일이나, 동시에 교회와 개인에게는 그 분이 다른 지역으로 가실 때까지 잠을 잘 곳과 먹을 양식을 책임져야 하는 경제적인 부담이었다는 말입니다.


2) 원망 없이 대접해야 할 또 다른 대상은 순회 설교자 뿐 아니라, 교회 안에 형편이 어려운 가난한 성도들이었습니다.

초대교회시대 과부로 상징되는 가난한 성도들을 섬기는 일도 사도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5장 3절에 보면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라고 말씀하는데, 나이 60 이상인 가난하고 믿음으로 섬긴 분들을 교회가 도와야 할 참 과부의 명부에 올리고 성도들이 그들에게 먹을 양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당시의 초대 교회는 지역 교회에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온 순회 설교자와 교회 안에 있는 나이 많은 과부 곧 홀로 생계를 꾸릴 수 없는 자들을 서로 돕고 대접해야 했습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 14절로 17절에서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참 믿음은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을 때 말로만 하지 말고 실제로 그 몸에 쓸 것을 주는 것이 참 믿음이며 사랑인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순회 설교자들과 교회 안에 있는 가난한 과부 곧 약자들을 돕고 섬기는 일에 있어서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순회 설교자를 대접하고 편의를 봐 주는 것은 복음 전도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교회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먹고 사는 것이 넉넉하지 않던 그 시대에 순회 설교자를 영접하고 대접하는 일은 그 일을 섬기는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먹기도 부족한 양식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었으며, 거주하는 방이 많지 않던 시대에 방을 내어 주거나 한 방에서 여럿이 함께 잠을 자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왜 순회 설교자들을 자주 오는가? 왜 우리 집에서만 순회 설교자를 먹이고 재워야 하는가하는 불평과 원망과 수근거림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순회 설교자를 영접하여 대접하는 일은 당장은 불편할 수 있고, 먹을 것을 나누어야하니 배가 고플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육신의 양식보다 더 귀한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보내시는 종들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며, 지난 시간에 살펴 본 대로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의 사랑을 받아 그 사랑을 소유한 성도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무조건적이고 자기희생적이며 값없이 주는 그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었으며, 바울 사도가 로마서 12장 8절에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었습니다.

3) 성도가 서로 대접하는 일을 원망 없이 하기 위해서 성도 각자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7장 36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인 시몬의 식사 초대를 받으시고 그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인이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눅 7:39)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에게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500데나리온을 하나는 50데나리온을 졌는데, 둘 다 갚을 것이 없어서 주인이 탕감하여 주었는데,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 시몬이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눅 7:43)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대답을 들으신 주님께서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눅 7:43)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라 하시고, 예수님께 지극한 감사와 사랑을 표시한 죄 많은 여인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눅 7:48)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많은 죄를 사함을 받은 여인은 예수님께 향유 담은 옥합을 깨뜨려 부어드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달으면 영원토록 지옥에서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움과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어 지옥만 가지 않게 해주셔도 무한 감사입니다. 그런데 의롭다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사 영원한 천국의 후사로 세워주셨습니다. 이 구원의 은혜 천국에서 누리게 하실 영생의 복과 은혜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받은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더 깨닫게 되기를 소원하고, 그런 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사랑과 구원을 기억할 때 주님의 이름과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섬기고 헌신하고 순회 설교자를 대접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을 원망없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오늘 본문 10절에서는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에게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섬기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에서 “은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리스마’인데, 우리말로는 ‘선물’이라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섬기라고 선물로 주신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은사”입니다. 이 “은사”는 성도 각 사람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물론 이 은사를 각 사람 모두가 받았지만 각자 성도가 받은 은사는 각자가 다 다릅니다. 성령께서는 성도 개개인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고린도전서 12장 4절로 11절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4절에서는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라고 말씀합니다. 5절에서는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라고 하십니다. 6절에서는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말씀하시고, 7절에서는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이 유익은 은사를 받은 성도 개인의 유익을 넘어서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성령께서 은사를 주시시고, 성령을 부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4. 사도는 이 은사를 받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자들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 “은혜를 맡은”에서 “은혜”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리스’라는 단어인데, ‘은사’를 뜻하는 ‘카리스마’ 같은 어원인 ‘기뻐하다, 즐거워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카리오’에서 나온 말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어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은혜”는 하나님께서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선한 마음 곧 선의와 호의’를 말하는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이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또한 로마서 8장 32절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신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내용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 10절에서 은사라는 말과 은혜라는 말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신 구원이 은혜요, 구원받은 자녀에게 주신 건강도 은혜요, 물질도 은혜요, 재능도 은혜요, 우리에게 주신 시간마저도 은혜입니다. 성도 개개인에게 주신 모든 은혜가 은사요, 모든 은사가 은혜입니다.

5. 하나님께서 주신 이 은사와 은혜를 사용하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하는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하십니다.

1) 성경에서 “선하다”는 말은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선하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에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선하다”는 말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행하여 자신의 재물을 다 팔아 구제한다 하여도 그 일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동기에서 나온 일이 아니라면, 인간적으로 대단해 보이는 구제와 자선 사업 그 무엇도 “선하다”는 표현을 쓸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구별된 단어가 “선하다”는 단어입니다.


2) 은사와 은혜를 사용할 때 “청지기”의 자세를 가지라고 하십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주인의 명령을 따라서 살림살이를 맡아서 일을하는 곳간지기를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어서 주신 은사요,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청지기의 자세로 내게 주신 은혜와 은사를 가지고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4장 7절에서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리하라고 맡겨주신 것을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나누어주어야 하는 곳간지기들이라는 말입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3권 7장 5항 ‘이웃의 유익을 구함’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성 자체로는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쓰라고 주신위탁물이라고 가르친다(벧전 4:10).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라고 가르치는데, 각 지체는 몸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지체 자체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고전 12:12).’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6항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는 ‘선을 행하되 낙심치 말고 선을 행해야 하는데,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과 비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이 도움을 요청해도 들어주어야 하는 이유 역시 그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메이르 알터라는 사람은 부와 물질이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설명하기 위해 이 ‘유리의 비유’를 사용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투명한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면 지나가는 가난한 이웃들과 고통 받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이것은 우리 영혼이 맑을 때 세상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그런데 그 유리 창문 뒤편에 재물을 상징하는 은으로 칠을 하면 같은 유리라도 자신만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서 타인이 보이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물질과 은사를 사용할 뿐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은혜, 곧 모든 복과 은혜를 거울 앞에 서서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나 자신 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사와 은혜를 선한 청지기와 같이 사용하는 하나님의 곳간지기인 청지기로 서로 섬기고 봉사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3) 청지기는 “봉사”하는 자입니다.

우리 말로 “봉사”라는 말은 ‘국가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함’라는 뜻인데, 헬라어에서 “봉사”라는 말은 ‘디아코네오’라는 말로서 ‘수종들다, 섬기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에서 ‘집사’를 뜻하는 ‘디아코노스’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교회에서 집사의 직분을 받은 분 뿐 아니라, 모든 성도가 청지기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청지기는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0장 43절로 44절에서 제자들에게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후에 45절에서 “인자가 온 것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최고의 섬김을 보이신 분은 당신의 목숨을 저와 여러분의 대속의 제물로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서 주님이 우리를 섬겨주심 같이 우리도 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인 성도들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6. 오늘 본문 11절에서는 성령께서 나누어 주신 은사와 은혜를 성도들과 나누기 위하여 선한 청지기들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봉사를 할 때에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1) 여기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라고 하신 말씀은 교회 안에서 우리의 언어생활이 얼마나 바르고 정결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라는 말씀은 우리 입에서 나오는 어떤 말이라도 사사로운 말, 내 말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말로 행해지는 은사인 말씀선포와 성경공부를 비롯하여 권면, 간증과 같은 말을 할 때에 오직 내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설교자도 강단에서 오직 성경만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서로 교제할 때에 사사로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제해야 하며, 그 입술로 어떤 악한 말이나 비방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앞서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2장 1절에서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 입에서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이 나온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는 것 같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주에 살펴 본 8절 말씀에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의 의미가 자기 죄를 뉘우친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고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는 뜻인 것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형제의 허물을 거듭 말하는 것은 비방이요,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주의 형제 야고보도 야고보서 3장 9절로 12절에서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성도의 덕 있는 말 곧 어떤 말을 하려 할 때에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과 형제를 저주하는 일을 하지 않고 오직 모든 말을 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하는 것은 어떤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사람을 세우는 은사입니다.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4장 6절에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도가 말을 할 때에는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라고 하셨는데, 내가 이 말을 함으로 음식에 간이 맞지 않아서 맛이 없을 때 소금으로 맛을 내는 것 같은 은혜로운 말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도에게 힘을 주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 말이 되기 위해서는 “항상 은혜 가운데서”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2) 또한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교회에서 몸과 행동으로 섬길 때, 이 모든 것의 공급자가 하나님이신 것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참된 섬김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봉사 곧 섬김의 일이 힘이 들지 않고, 또한 내가 섬긴 것을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해 하지도 않고, 또 내가 행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알아달라고 자랑하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셨다는 바른 고백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학개서 2장 8절에서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말씀해 주셨고, 시편 50편 10절에서는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한 앞서 말씀드린 대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4장 7절에서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봉사 곧 섬김의 일을 감당할 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이렇게 행할 때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봉사할 때 ‘내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의 은사와 행동의 은사를 통하여 성도를 섬기는 일에 참여하지만, 그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을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됩니다. 성도를 섬기는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기록한 젊은 날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과 함께한 마지막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만 해도 ‘길에서 누가 크냐?’라는 것을 가지고 다투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왕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예수님 다음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었습니다.

그러던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고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사람을 일어나 걷게 한 후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자 사도행전 3장 12절로 13절에서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증거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교회에서 성도를 섬기는 모든 일의 결국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섬기는 “범사” 곧 모든 일을 행할 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행하여야 합니다. 여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에서 “말미암아”라는 말은 헬라어 전치사 ‘디아’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통하여, 때문에’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성도는 범사에 모든 일을 행할 때 곧 서로 대접할 때, 은사를 받은 대로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봉사하는 일, 또한 말의 은사를 사용할 때와 몸으로 하는 봉사 곧 섬김의 은사를 사용할 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모든 일을 행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4)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진실로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충만한 임재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구약에 빽빽한 구름 가운데 하나님께서 성전에 임재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했다고 말씀하는데, 인간이 죄로 인하여 이 땅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이 깨닫지 못할 뿐이지, 하나님의 영광은 하늘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가운데서도 항상 충만합니다. 예수님 재림하시는 날 천국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세세무궁토록 충만한 상태가 계속될 것입니다.

“권능”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라토스’라는 말인데 ‘통치권, 주재권’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모든 것을 하나님의 기쁘시고 거룩하신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도가 모든 일을 행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하여야 하는 이유는 세세무궁토록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충만하고 또한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이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성도는 또한 충만한 영광으로 온 만물 위에 계시고 그 만물을 주관하시는 통치권과 주재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줄을 알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이나, 환경이나, 사탄 마귀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행함으로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 본 8절에서 “사랑할지니”라는 말이 ‘아가페 에콘테스’라는 두 단어인데,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의 사랑을 가지라’는 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의 사랑 곧 죄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 주신 무조건적인 사랑, 자기희생적인 사랑, 값없이 주는 사랑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고 이 사랑을 가지고 있을 때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할 수 있고, 또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할 수 있으며, 어떤 말을 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봉사할 때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행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의 사랑으로 무장되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또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말의 은사와 행동의 은사를 바르게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