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예배 베드로전서 강론(30) "마지막 때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베드로전서 4장 7절로 8절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1. 지난 시간에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기록한 말씀을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육체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의 원인은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당하심은 우리의 죄 때문에 당하신 부당한 고난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를 위해서 부당한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죄악의 낙 곧 죄의 즐거움을 따라서 살 것인가 그것을 거부하고 주를 위해서 고난을 받을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죄가 하나도 없으신 분이 부당한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생각하고,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을 때 죄의 낙을 택하는 것 대신에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 당하는 고난을 선택함으로 죄를 그치는 삶 곧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한 바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삶은 베드로전서 4장 2절에서는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는 삶이요, 3절에서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방인들 곧 불신자들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뜻을 따라서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만물이 마지막이 가까운 말세의 때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가를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볼 때에 성령님께서 말씀을 잘 깨닫게 하시고 오늘 본문이 말씀하시는 대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때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인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며 서로 뜨겁게 사랑함으로 허다한 죄를 덮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2. 먼저 본문 7절에서는 베드로 사도는 그 당시의 시대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시대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1) 베드로 사도가 이 편지를 쓰면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고 말한 것은 예수님께서 몇 달 또는 몇 년 내에 다시 오셔서 세상의 역사를 끝내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란 의미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베드로 사도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그런 의미로 말씀했다면, 그 때로부터 2천년의 시간이 지났으니 베드로 사도가 잘못 말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말씀하는 ‘마지막 때’ 곧 ‘말세’는 이미 예수님의 초림으로 시작이 되었고,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때를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구속을 완성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오순절 성령을 교회에 부어 주심으로 복음이 전파된 교회 시대에는 어느 때라도 주님이 재림하실 수 있는 때입니다.
① 히브리서 1장 1절로 2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때가 마지막 때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때가 “이 모든 날 마지막” 곧 ‘말세’에 보내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심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시점부터 이미 말세의 시대에 진입했음을 선포해 주고 있습니다.
② 또한 오순절 성령 강림이 말세의 성취라고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요엘서 2장 28절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구약 요엘 선지자가 예언했던 “말세”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의 성취라고 증거하였습니다.
③ 요한 사도도 자신이 사역하던 그 시대가 “마지막 때”라고 요한일서 2장 18절에서 두 번이나 강조하여 말하였습니다.
“18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④ 바울 사도도 고린도전서 10장 11절에서 그 시대가 “말세”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2) 사도들의 말세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예수님의 교훈으로부터 출발한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1장 5절로 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시작으로 말세가 시작되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 파괴로부터 재림까지의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5절로 6절에서는 말세의 시작인 성전파괴에 대해서 “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일이 주후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무너트림으로 성취되었으나, 그러나 이 일은 말세의 시작이지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말세의 마지막이라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9절에서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10절로 11절에서 예수님의 재림 곧 말세의 마지막 때의 일어날 일들을 “10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1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24절에서는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라고 말씀하신 후 27절로 28절에서 “27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8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세의 징조 곧 대핍박의 어두운 그림자가 교회를 엄습하는 것을 보면서 주님이 말씀하신 말세가 가까이 왔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 사도가 그 시대를 “만물이 마지막이 가까이” 온 말세라고 말한 것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말입니다.
3)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 뿐 아니라 이미 베드로전서 1장과 베드로후서 3장에서도 말세 대하여 가르쳐 주었습니다.
먼저 베드로전서 1장 20절에서는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라고 이미 당시 시대가 “말세”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또한 베드로후서 3장 3절로 7절에서는 예수님의 재림을 부인하는 자들이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전 3:4)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재림과 재림으로 완성될 말세 곧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완성된다는 것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과거 노아 시대에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는 하늘과 땅을 불사르기 위하여 심판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승천하신 후 이 땅에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재림 전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모든 약속이 이루어진 때인 초대교회로부터 오늘 우리시대까지 예수님께서 언제라도 재림하실 수 있는 말세요,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재림하셨거나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재림하신다 할지라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약속이 이루어질 때를 살고 있습니다.
3. 그러나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2천년이 지나가는 오늘날까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지 않으신 것은 택한 백성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길이 참으심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서 노아 때 세상이 물로 멸망함 같이 이제도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라고 말씀하신 후, 그 다음 구절인 베드로후서 3장 8절로 13절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살 것을 이렇게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때에나 재림하실 수 있으시나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천년을 하루 같이 여기시고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약속이 주어진 후 2천년 교회시대가 계속되는 것은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4. 오늘 본문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시간상으로 가까웠다는 말씀일 뿐 아니라, 성도의 삶이 종말론적인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1) 종말론적인 삶이란 오늘이라도 주님이 재림하실 수 있고, 그래서 오늘이 나에게 주어진 지상에서 마지막 날일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것을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당시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온 때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은 종말이 가까이 있다는 공포를 심어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조정하여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갈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2) 종말에는 2가지가 있는데, 예수님의 재림 때 이루어지는 우주적인 대종말과 개개인의 죽음으로 이루어지는 개인적인 종말이 있는데, 이 성도가 육체의 죽음으로 맞게 되는 개인적인 종말을 소종말이라고도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림의 때를 궁금해 하는 제자들에게 마태복음 24장 36절에서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마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다시 보내시어 온 세상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재림의 날은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에 속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우주적인 대종말의 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개인적인 종말 곧 성도 개개인이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는 때는 대다수가 100년이 안 되는 시간 속에서 부르심을 받게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을 갈망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종말도 항상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때가 이를 때 우리는 주와 영원히 영광 중에 거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광의 날을 생각하고 주님의 재림으로 인한 우주적인 종말이든 우리 개개인이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개인적인 종말이든지, 그리스도인들은 이 종말을 부정적으로 또는 공포스럽게 여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이 말세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은 남은 인생을 공포심에 사로잡혀 벌벌 떨면서 살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구속의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격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신랑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산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되 헛된 정욕을 따라 사는 자가 아니라, 우리의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라는 의미에서 종말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3)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우주의 종말의 날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하신 우리의 영화로운 구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만일 역사가 끝이 없이 계속되고, 또한 사람이 죽지도 않고 죄로 인하여 개개인이 늙고 병들어감에도 죽지 않고 계속해서 산다면 이것이 바로 재앙입니다.
육신 뿐 아니라, 죄로 인하여 서로 다투고 싸우고 죄의 욕망이 충돌하여 고통 받는 세상이 영원히 계속된다면 이 땅에 사는 인생들은 참으로 불행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으로 모든 악에 대한 공의의 심판을 시행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그 분의 의를 전가 받아 의롭게 된 자들을 영화롭게 하시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고 하나님과 영생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그 때가 인생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도 가장 복되고 영화로운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심판하시고 택한 백성을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은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높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일이며,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마지막” 때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완벽하게 이루어주실 줄을 믿어야합니다.
5. 만물의 마지막 때는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로 13절에서는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1) 여기서 주님은 재림의 날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줄 상이 있다고 하시고 또한 내가 속히 올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면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여기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라는 말씀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글자인 알파와 마지막 글자인 오메가를 뜻하는데, 히브리적 사고에게 처음과 끝은 전부를 뜻합니다. 그 모든 전부를 계획하시고 계시하여주신 존재와 지식과 진리의 시작과 마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처음과 마지막이요”라고 하셨는데, “처음”은 헬라어로 ‘프로토스’로서 순서에 있어서 첫 번째를 뜻합니다. “마지막”은 헬라어로 ‘에스카토스’인데, 시간과 어떤 일의 과정의 맨 마지막 끝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의 처음 시작이요, 맨 마지막의 끝이 되신다는 말은 예수님께도 끝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처음과 끝을 주관하시는 주관자 곧 그리스도의 존재의 영원성과 불변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작과 마침이라”하셨는데, 여기 “시작”이라는 말은 헬라어 ‘아르케’라는 말로서 만물과 인생의 기원과 생성의 원인을 뜻하는 말이고, “마침”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텔로스’인데, 모든 일과 목적의 완성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역사의 끝맺음을 하시는 분, 이 땅과 인간 역사의 문을 자신의 뜻 가운데서 마무리하시는 모든 일과 사역과 경륜의 완성자라는 뜻입니다.
2) 그래서 오늘 본문이 7절에서 말씀하는 “만물의 마지막”이라는 말과 계시록 22장 13절에서 말씀하는 “마침”이라는 말의 헬라어가 같은 단어인 ‘텔로스’인데, 이는 하나님이 뜻이 완성되는 때를 말씀합니다.
이 세상은 인간들이 서로 싸워서 파멸로 끝을 맺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서의 완성이요, 마침이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10장 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라고 말씀하는데, 여기 “율법의 마침”이라는 말에서 “마침”이 똑같은 ‘텔로스’라는 단어로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구속의 사건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를 완성하시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인데, 이 ‘테텔레스타이’와 “마지막”, “마침”이라는 단어가 어근이 같은 ‘텔로스’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만물의 마지막” 곧 우주적인 대 종말인 그리스도의 재림, 또한 소종말인 성도 개인의 죽음은 이 땅에서의 삶의 단계를 완성하고, 영원토록 하나님 앞에 서게 하는 새로운 단계의 시작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순례 길을 마치고 주 앞에 서는 날 주님께서는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라고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의 삶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인 것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의 삶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압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젊어서 고생하여 부를 축적하였는데, 치료 불가능한 질병에 걸리게 되면 다 쓰고 죽지 못하는 것이 원통할 뿐이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소망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죽음 앞에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보배 피로 죄 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들은 “만물의 마지막” 곧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한 우주적인 대종말이나 또는 성도 개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세상을 떠나는 개인적인 종말을 맞이한다 하여도, 그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삶에 마침표를 찍는 것뿐이요, 이후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하신 영원한 영생의 삶 곧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의 교제 속에서 영원토록 영광을 누리는 영생의 삶의 새로운 시작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6. 이렇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베드로사도는 7절 하반절에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라고 말씀합니다.
1) 먼저 “정신을 차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정신을 차리”다는 말은 헬라어로 ‘소포로네오’인데, ‘정신을 차린, 분별력이 있는’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술에 취하지 않은 맑은 정신 상태’를 말할 뿐 아니라, ‘세상의 유혹과 가치관에 흔들리지 않는 영적인 명료함’을 말합니다.
2) 두 번째로 “너희는... 근신하”라고 말씀합니다.
“근신하라”는 말은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을 방해하는 중독(술취함과 어떤 일에 과도히 빠져드는 것들), 또는 부주의함 또는 태만함에 빠져 “만물이 마지막이 가까”운 때를 살아감에 있어서 “이방인의 뜻을 따라” 죄를 짓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3) 세 번째로는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이 때에 저와 여러분의 기도는 지난 시간에 살펴 본 대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이 자녀가 되었으니,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고 ‘죄의 즐거움을 위해서 살 것이냐, 아니면 주님이 나를 위해서 부당한 고난을 당하심 같이 나도 주님을 위해서 부당한 고난을 받을 것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부당한 고난을 택함으로 죄를 그치는 삶 곧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이 때에 저와 여러분의 기도는 이제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이런 삶은 우리의 결심과 노력으로 되지 않는 일이기에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와 충만을 부어 주시고, 우리가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7. 끝으로 오늘 본문 8절에서는 무엇보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1) 여기 “사랑할지니”라는 말에서 “사랑”은 헬라어로 ‘아가페’ 곧 ‘하나님의 사랑’인데,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가지고 서로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①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자격이나 조건을 따지지 않고 베풀어진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실을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② 또한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는 죄인 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 주신 ‘자기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③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는 ‘받으려는 사랑이 아니라 값없이 주는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2) “사랑할지니”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가페 에콘테스’라는 두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에콘테스’라는 말은 현재, 능동태, 분사로서 ‘가지고 있다. 잉태하다’라는 말로서 성도 서로를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인 이 아가페의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사랑을 가지고 있을 때 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이 사랑을 실천할 때 허다한 죄를 덮어 줄 수 있습니다.
3)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① 바울 사도는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로마서 5장 8절로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시어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진로에서 구원하여 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 된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시고, 그 아들로 우리에게 내리셔야 할 진노를 대신하게 하시고 우리와 화목을 이루어주신 사랑입니다. 참 사랑인 아가페 사랑의 샘 근원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② 요한 사도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요한일서 4장 9절로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9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10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 주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1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십니다.
4) 성도가 서로가 가지고 있는 이 사랑을 실천할 때 이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되,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가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가는 것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가 아니라, 바로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로 사랑”함으로 형제의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삶입니다. 이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우리가 가질 때 실천할 수 있으니, 이 사랑으로 충만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 이하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와서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21절)라고 질문할 때 주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22절)라고 말씀하시면서 일만 달란트 빚진 것을 탕감받은 한 사람을 말씀해 주시면서 그 사람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가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29절)라고 말할 때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30절)었다는 소식을 주인이 듣고 일만 달란트 빚진 그 사람을 옥졸들에게 넘겼다고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일 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인데, 당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과 각종 절기를 쉬고 일 년에 300일을 일한다고 해도 햇수로 20만년을 일해야 벌수 있는 금액입니다. 그래서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는 것은 도저히 사람이 갚을 수 없는 금액의 빚을 탕감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이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자신이 받은 은혜를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면, 100데나리온 빚진 자기 동료를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사랑은 세상 사람들은 실천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경험한 성도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받은 바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는 말씀은 형제의 죄를 보고 모른 척 하고, 죄가 있음에도 치리와 권징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 말씀의 뜻은 형제의 허물과 죄가 드러났다면 죄를 꾸짖어 잘잘못을 따지고, 죄를 범한 사람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잘못의 용서를 구한다면, 그 형제에게 권고의 말을 전한 후에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말고 덮어두고 그 잘못에 대해서 그 사람 앞에서나, 다른 사람 앞에서 계속해서 비방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잠언 10장 12절에서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미움’과 ‘사랑’을 대조하고 있고, ‘다툼을 일으킨다’와 ‘허물을 가린다’는 말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죄를 범한 형제를 미워하여 계속해서 그 죄와 허물을 말하게 되면 다툼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형제가 잘못한 일을 깨닫고 용서를 구했다면 그 허물을 덮어주고 더 이상 비방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허물을 볼 때마다, 주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았다면, 나도 저 형제처럼, 아니 저 형제보다 더 넘어질 수 있었는데, 주께서 내게 은혜를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형제의 허물을 감싸 주고 다른 사람 앞에서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이 ‘말세’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사랑하신 이 사랑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시고 이 사랑을 따라 살아가는 은혜를 달라고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기도응답으로 주시는 은혜 속에서 육체의 남은 때를 사람의 정욕을 따르는 삶인 이방인의 뜻을 따라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되, 무엇보다 뜨겁게 서로 사랑함으로 형제의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