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예배 베드로전서 강론(28)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권능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
베드로전서 3장 19절로 22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오늘도 주의 말씀 증거할 때에 성령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잘 깨닫게 하시어서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셨으나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신 후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우편에서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복종하는 영광의 자리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고, 낮아지셨으나 높아지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높여 주실 그 영광의 날을 바라보고 주님을 닮아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1. 오늘 본문 말씀 중 19절로 21절은 해석하기에 가장 어려운 난해구절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거스틴과 칼빈의 성경해석을 따르는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이 말씀이 그리 논란이 될 것이 없는 말씀이지만, 초대 교부 중에 몇 사람과 로만 카톨릭과 루터교의 해석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난해구절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난해구절인 19절과 21절을 포함하는 오늘 본문은 베드로전서 3장 17절부터 22절까지 한 문맥 속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해석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19절로 21절 말씀은 잠시 괄호 안에 묶어 두고 지난주에 살펴 본 18절에서 22절로 바로 연결해도 무리가 없는 말씀입니다.
18절에서 22절로 바로 연결하면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라고 읽을 수 있는데, 이렇게 18절과 22절을 연결해서 읽으면 이 문맥에서 베드로 사도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 강조점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단번에 죽으신 그리스도 곧 의인으로서 불의한 저와 여러분을 대신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는데, 육체로는 죽으셨으나 영으로 살리심을 받으신 후 하늘로 승천하사 하나님 보좌우편에서 지금도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에게 복종을 받으시는 만왕의 왕이시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도 선을 위하여 고난을 받고 때로 그리스도처럼 낮아지는 때가 있으나, 결국 고난 다음에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높아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을 말씀해 주시고자 함입니다.
2. 그러면 19절로 21절의 말씀을 죽은 다음에 다시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고 해석하는 초대 교부들의 입장을 살펴보겠습니다.
1) 초대교회 시대 아직 신학이 정립되지 않은 때에 이 구절만 가지고서 죽은 다음에 다시 회개할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바로 알렉산드리의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였습니다.
이들은 오늘 본문 19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라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그 영으로 지옥에 가서 복음을 전하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 땅에서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던 자들에게도 죽은 다음에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을 선택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클레멘트는 그리스도께서 음부에 내려가시어서 오늘 본문 20절에서 말씀하는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에게 뿐 아니라, 율법 없이 살던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하였고, 그리스도 뿐 아니라, 사도들도 죽은 후에 음부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세례를 주었다는 독특한 견해를 제시하였습니다.
2) 그러나 이 해석은 성경 전체에 비추어서 받을 수 없는 견해입니다.
① 성경에서는 죽음 이후 두 번째 구원의 기회가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전도서 9장 4절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죽은 다음에 또 다른 구원의 기회는 없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죽은 다음의 모습을 주님께서 말씀해 주실 때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라고 요청할 때 아브라함은 대답하기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고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또 부자가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 16:27-28)라고 요청할 때 아브라함은 다시 말하기를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라고 말하였고, 다시 부자가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라고 대답하자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라고 대답하였습니다(눅 16:29-31).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일은 오직 세상에 있을 때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권함을 받”을 때 곧 설교자들이 증거 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다시 회개할 다른 기회는 없습니다.
② 클레멘스는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라고 하였으나, 이것은 인간중심의 사고입니다.
죄인의 구원은 인간이 복음을 듣고 믿을 것인지, 믿지 않을 것인지를 선택하는 인간의 결정에 있지 않습니다. 죄인의 구원은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나 그 가운데서 오직 은혜로 구원하실 자들을 택하시고 성령님의 역사로 믿음을 주시어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사역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복음을 들어도 스스로 복음을 깨닫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중생케 하시는 역사가 없으면 아무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또한 죽음 이후에 복음을 들을 기회가 있다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6장 2절에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하신 말씀은 잘못된 말씀이며, 순교를 각오하고 복음을 전한 사도들의 수고는 무색해지고, 오늘도 순교자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는 자들로 만드는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도 복음을 듣고 회개할 기회가 있는데, 이 땅에서 그리 애를 쓸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2. 또한 오늘 본문 19절로 21절의 말씀을 로만 카톨릭에서는 연옥설의 근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로마교에서는 19절로 20절의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라는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부활하시기 전 영으로 죽은 자들의 처소에 가셔서 복음을 전하신 실제 사건이라고 해석을 하는데, 여기서 말씀하시는 “옥”을 ‘지옥’을 뜻하는 ‘게헨나’가 아니라, 그리스도 이전에 죽은 의인들이 하나님을 뵙기를 가리며 머물던 ‘연옥’ 곧 ‘선조 림보’라고 설명하면서 예수님이 그곳에 가신 이유는 심판이 아닌 해방을 위해서 즉 구약의 의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들을 하늘나라로 인도하기 위한 승리의 행진이었다고 해석합니다.
앞서 클레멘트는 예수님께서 지옥에 가셔서 복음을 전하심으로 제 2의 구원의 기회를 주신다고 해석했다면, 연옥설을 주장하는 로마교에서는 지옥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였으나 천국에 바로 가지 못한 자들의 처소인 연옥에 머물러 있는 자들 곧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신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2)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연옥이 아닌 즉시 구원을 받고 죽은 후에는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함께 달린 강도 중의 한 사람이 회개하며 ‘주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간구할 때 주님께서는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로마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없고 행위가 있어야 한다면 십자가상에서 회개한 강도야 말로 죽어가면서 예수님을 믿고 선을 행한 것이 전혀 없으니 그 사람이야 말로 낙원이 아니라, 연옥에 가서 그 누구보다 오랜 기간 정화의 거쳐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연옥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주님께서는 ‘네가 나를 믿기는 하나 행위가 없으니 오늘 너는 죽어서 연옥에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셔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오직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에 연옥은 없습니다. 만일 믿음으로만 구원얻는 것이 불가능하고 인간의 행위가 더해져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이것은 영 단번에 죄인의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완전하고도 충분한 대속의 구원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한 구원 이외에 다른 구원을 말한다면, 로마교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성경의 바른 교훈을 떠난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4. 루터파에서는 베드로전서 3장 19절로 20절을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가셔서 승리를 선포하신 사건으로 해석을 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음 이후에 실제로 지옥에 내려가신 이유는 승리의 선포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루터 사후에 루터파의 교리적 분쟁을 종식하기 위하여 작성된 그들의 [일치신조]에서 그리스도는 영혼만이 아니라 인성과 신성을 가진 전인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부활직전이나 직후에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가르칩니다. 물론 루터파에서는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셔서 지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심으로 다시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사후 구원론]이나 [제2의 기회]를 철저히 배격하고 로마교의 교훈과 같이 연옥에 있는 자들을 구원하려 가셨다는 것을 반대하며 다만 사탄의 권세를 멸하시고 사망을 정복하셨음을 확인하는 사건으로 정의하나 개혁주의에서는 루터파가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를 교리로 받지 않습니다.
5.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오늘 본문 19절로 20절의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라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이전에 성령으로 노아를 감동하사 회개를 선포하게 하셨는데, 그들이 거절하여 지금은 그들이 지옥에 있다는 말씀으로 해석을 합니다.
1)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보면 우리말로는 번역되지 않은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내용입니다.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라는 부분의 영어로 된 사도신경에서는 ‘장사되시어 지옥에 내려가시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교회사 속에서 ‘지옥에 내려가시고’라는 이 표현은 3세기까지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4세기 말 이탈리아 북부 아퀼레이아 지역의 교회에서 고백한 사도신경에 처음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루피누스가 쓴 사도신경 주해에서 그는 ‘지옥에 내려가시고’라는 표현을 설명하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죽으셔서 무덤에 장사되신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웨스터민스터 대요리문답 제50문에서도 예수님께서 낮아지심을 가르치면서 이 부분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 50문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그의 낮아짐은 무엇입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그의 낮아지심은 장사되셔서, 죽은 자의 상태로, 제3일까지 사망의 권세 아래 머물러 계셨음을 말합니다. 이를 다른 말로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 가셨다”라고 표현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클레멘트가 주장한대로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지옥에 내려가셔서 복음을 전하시어 제2의 구원의 기회를 주셨다라거나, 로마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믿음으로 살았으나 선행이 부족하여 연옥에 있는 선조들에게 가시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함이라거나, 루터파에서 가르치는 대로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승리를 선포하시고 악한 자들의 패배를 선언하신 것이라는 것을 지지하는 성경구절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오늘날 신사도 운동의 영향을 끼친 케네스 헤이긴은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시어서 우리가 받아야 할 지옥 형벌을 다 받으셨다고 주장하였는데, 한편으로 이 말을 들으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지옥의 고통까지 대신 담당해주셨다라는 생각에 더 감사한 마음이 들 수 있으나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라는 말인데, 당시 상업적으로는 ‘물건의 값이 다 지불되었다’라는 뜻이며, 제사 용어로는 ‘흠없는 제물이 드려졌다’는 말이고, 법정 용어로는 ‘형벌이 완료되었다’는 의미도 쓰인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택한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심으로 죄인을 구원하시기에 필요한 모든 구원의 계획이 완결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으로나 몸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지옥의 형벌을 받기 위하여 지옥에 가신 일이 없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값을 다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2) 어거스틴과 칼빈의 성경해석의 전통을 따르는 개혁주의에서는 오늘 본문 19절로 20절의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라는 이 말씀을 해석하되 예수님께서 실제로 물리적인 지옥으로 영혼이나 몸이 내려가셔서 지옥에 있는 자들에게 복음이나 회개를 선포하셨다는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개혁주의 학자들은 여기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라는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베드로사도가 이 편지를 쓸 당시에는 지옥에 있으나 과거에 노아 시대 이 땅에 살았던 자들 곧 20절에서 말씀하는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노아를 감동하사 그들에게 회개를 전파하셨다는 말씀으로 해석을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10절로 11절에서는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 구약시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선지자들을 감동하시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증거하게 하셨다고 베드로 사도가 기록한 것처럼, 과거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이전에 그의 영이신 성령으로 노아를 감동하사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던 긴 시간 속에서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고, 그래서 그들은 100년도 넘는 회개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긴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음에도 회개하기를 거절한 그들은 지금 지옥에 처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내용이 바로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는 말씀의 개혁주의의 해석입니다.
3) 베드로 사도가 옥에 있는 자들 중에서 특별히 노아시대 사람들을 언급한 것은 복음을 듣고 회개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참으로 그 말씀대로 회개하고 바르게 믿는 자의 수가 매우 적은 때도 있었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① 20절 하반절에서는 “20...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라고 말씀해 주시는 대로 타락한 노아 시대에 구원얻을 자가 겨우 8명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물론 그 시대사람들 가운데 물에서 구원을 받은 노아마저도 자기 의로 구원을 얻을 것이 아니라, 창세기 6장 8절에서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는 말씀처럼 노아의 가족 8식구도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노아 시대에 물에서 구원을 받은 자가 8명 뿐인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베드로 사도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은혜의 시대를 허락해 주셨는데, 참으로 믿는 자들은 노아시대 경고를 받았으나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은 자들처럼 하지 말고 믿음에 걸맞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은 형편이 좋을 때만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우리가 거듭난 성도에게 주신 선한 양심을 따라서 선을 행하며 살아야하고 그 과정에서 고난을 받을 때에라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먼저 불의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이 은혜를 입은 저와 여러분 모두도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자들이 될 것을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노아는 홍수가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묵묵히 사람들의 비난과 놀림을 감수하고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방주의 문이 닫히고 비가 내리고 홍수가 시작되어 방주가 물 위에서 떠오를 때 노아의 회개의 메시지를 거절했던 자들은 다 멸망을 당하였고, 오랜 기간 사람들의 멸시를 받아야 했던 노아의 8식구는 그 물에서 건지심을 받았습니다. 그 때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며 세상에서 멸시와 조롱을 당한 노아의 믿음이 인정받는 때였습니다.
② 창세기 18장 16절 이하에 보면 소돔 성에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 성을 심판하러 가시는 길에 아브라함을 만나 주셨고, 아브라함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십니까’라고 말씀을 드리면서 최종적으로 ‘그 성에 의인 10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여쭈었고, 여호와께서는 ‘그 성에 의인 열 명이 있어도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는데도 그 성은 결국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하고 말았고 롯과 그의 두 딸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롯의 아내마저도 뒤를 돌아보아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시대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순종하는 진실한 성도를 10명을 찾으신다면 저와 여러분 모두가 그 수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성도는 그리스도를 닮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물론 이렇게 선한 양심을 따라 선한 행실을 행함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선한 양심을 따라서 선한 행실을 행하는 사람들로 살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여러 사람이 가는 넓은 길로 가면서 나도 다른 사람처럼 신앙생활을 하니 큰 문제는 없을 거라 스스로 위로하면서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어 신앙생활을 하려 하기보다는 노아 시대 구원받은 8명 중에 한 사람, 소돔성에서 하나님께서 찾으셨던 의인 10사람 중에 하나가 되어야겠다는 소원을 가지고 주님께서 단번에 주신 믿음의 길을 따라 가면서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보지 않고 주를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6. 오늘 본문 21절에서 노아가 방주를 인하여 구원얻은 그 물을 세례라고 말씀해주시고, 참 세례는 “선한 양심의 간구”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1) 왜 베드로 사도는 노아시대 심판의 홍수의 물을 세례라고 말씀합니다.
노아 시대의 홍수의 물은 죄인을 심판하는 도구였지만, 방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들을 탄 방주를 들어 올려 구원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노아 홍수 때의 물이 구원 받은 그들에게 세례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절로 2절에서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말씀하면서 출애굽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사건을 세례라고 말씀하였는데, 홍해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애굽의 군대는 모두 그 물에서 죽었으나,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한 출애굽 백성들은 그 물에서 건지심을 받았기에 홍해를 건넌 사건을 신약의 세례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물은 죽음의 상징입니다. 노아 홍수 사건이 그것이고, 출애굽 백성이 건넌 홍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도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합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라는 고백을 하는 자에게 베푸는 것이 바로 물세례입니다. 이처럼 세례의 물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살아났음을 보여주는 공적인 표라는 말입니다. 세례가 구원의 표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사탄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2) 또한 베드로 사도는 21절 하반절에서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① 세례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라는 말씀은 세례의 본질이 외적 정결이 아닌 영적 정결과 영적인 회복에 있음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외적으로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는 것은 단순한 목욕이나 유대교적 정결 예법을 뜻합니다. 그러나 세례는 단순히 몸을 씻는 예식이 아닙니다. 진정한 세례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양심이 깨끗해진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선한 양심의 반응인 선한 행실의 삶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② 또한 참 세례의 의미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 “선한 양심의 간구”에서 “간구”라는 말은 헬라어 ‘에페로테마’라는 말로서 ‘질문, 요청, 응답, 서약’ 등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선한 양심의 간구”라는 말은 하나님의 시선을 감당할 수 있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는 믿음의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선한 양심의 간구”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피로 죄 씻음을 받아 선한 양심을 소유한 성도는 그 선한 양심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음을 하나님 앞에서 확신하고 고백하게 되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은 자로서 합당하게 살아가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게 된다는 말이 “선한 양심의 간구”라는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합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임을 인치는 세례를 받은 자인데, 참 세례 곧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더러운 양심을 씻어 선한 양심을 가진 자로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여 담대히 설 수 있음을 확신하고 고백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은혜를 간구하는 선한 양심의 간구를 드리는 자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8. 이런 성도에게 22절에서는 그리스도께 순종할 것과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세상을 두려워하지말 것과 또한 선한 양심의 간구를 따라 살아가는 자들에게 높아지신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높아질 소망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1)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육체로 죽으시고 영으로 부활하신 후 그리스도는 이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데 그 그리스도 앞에서 현재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 말씀하는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은 각양의 천군 천사들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통치에 모든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순종하는데,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 앞에서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된 저와 여러분은 더욱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범죄 하지 않은 하늘의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리스도께 순종한다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구원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더 순종하는 자리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2)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의 복종을 받으시는 통치자로 계시니 그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섬기며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는 자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우편에서 천사들의 복종을 받으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왕적인 권세로 오늘 의를 위하여 고난받는 성도 편에 계시고 성도를 도우십니다. 그러니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다 하여도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더욱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의지하면 족한 것입니다.
3) 뿐만 아니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또한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는 통치자로 계시다는 이 사실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살아가는 성도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을 바라보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누가복음 22장 30절에서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계시록 22장 5절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땅에서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수고한 자들에게 주님은 천국에서 주와 함께 왕노릇 할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22절에서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라고 하시는 이 말씀은 우리 죄를 위하여 단번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더욱 순종해야 하고,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을 때 모든 피조물이 복종하는 우리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지키심을 인하여 두려워말고 담대하게 고난 가운데서 선을 행하며, 또한 고난 받으셨으나 높아지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높여 주시는 날이 영광 가운데 임할 것을 바라보고 살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소망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인하여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고, 선한 양심을 따라서 선을 행할 때 오는 고난을 두려워 말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의로우신 분으로서 고난 받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더욱 닮아가며,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된 선한 양심을 따라서 선한 행실로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