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AT JOONGSIM

강의안

말씀을 배우고 삶으로 나누는 자료입니다.

주일 낮예배 베드로전서 강론(26) "선한 양심, 선한 행실"

베드로전서 3장 16절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도 주의 말씀 증거할 때에 성령님께서 잘 깨닫게 하시고, 본문의 말씀대로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신 말씀과 그 선한 양심에서 나오는 선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복된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1. 지난 시간 베드로전서 3장 15절 말씀을 통하여 베드로 사도가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교훈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1) 먼저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 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였는데,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삶 곧 그리스도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성도의 삶의 목적입니다. 성도의 삶의 목적인 그리스도를 거룩하게 하는 삶은 동시에 성도로 하여금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게 하는 성도의 거룩한 삶이기도 합니다. 오직 우리가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주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경외하는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을 드러낼 수 있고 동시에 우리도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2) 또한 성도의 심령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는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또는 어떤 상황과 환경이 우리에게 ‘왜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까지 그리스도를 마음에 주로 모시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냐?’라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과 그 이유를 묻는 때에 대답할 것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고난과 핍박에도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저와 여러분의 소망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소망의 이유를 세 가지로 말씀을 드렸는데, 첫째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이어 받을 천국 소망이요, 둘째는 이 소망을 가지고 주의 뜻대로 순종하며 충성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상급에 대한 소망이요, 셋째는 예수님을 계신 그대로 뵈오며 주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의 교제에 참여할 소망이었습니다.

3) 이 소망에 관한 이유를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데,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소망의 이유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줄 때 우리는 온유함으로 전해야 합니다. 죄인 괴수인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와 소망을 증거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과 지혜와 사랑을 온유하고 겸손하게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또한 두려움으로 준비해야 하는데, 이 두려움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 곧 거룩한 두려움인 경외함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창조와 통치와 심판과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죄에 빠진 모든 인생을 영원한 지옥 형벌에 던지셔도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구원하여 주시는 그 은혜를 경외함으로 대답할 말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이 세상에서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증거할 때의 자세는 경외함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4)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3장 16절에서는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16절의 말씀은 지난 주에 살펴 본 15절과 연결되어 있는데,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며, 소망에 관한 이유로 충만한 성도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행실을 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선행” 곧 ‘선한 행실’이 “선한 양심”으로부터 나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한 양심”이라는 밭에서 ‘선한 행실’이라는 열매가 맺힌다는 말입니다.

2.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양심은 무엇입니까?

양심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속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도록 새겨주신 영적, 도덕적 의식을 말합니다.

‘양심’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쉰에이데시스’인데 이 말은 ‘함께’라는 뜻을 가진 ‘쉰’이라는 단어와 ‘안다, 보다’라는 뜻의 ‘에이도스’라는 단어의 합성입니다. 영어로 ‘양심’을 ‘칸션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라틴어 ‘칸션티아’에서 온 말인데, 이 단어도 역시 ‘함께’ 라는 뜻의 ‘칸’과 ‘앎, 지식’이라는 뜻의 ‘센티아’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양심이라는 말은 ‘함께 보고 함께 안다’는 말인데, 누가 함께 보고 함께 아느냐면, ‘양심을 주신 하나님과 사람의 양심이 그 사람 자신이 행하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인지 옳지 않은 일인지를 함께 안다’는 뜻이 바로 양심이라는 말입니다.


칼빈은 양심에 대하여 기독교강요 3권 19장 15항에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지각을 가져서 그것이 증인이 되어 죄를 숨기지 못하도록 만들고, 오히려 그들을 하나님의 법정 앞에 죄인으로 끌어다 놓을 때에, 그 지각을 일컬어 양심이라는 부르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칼빈이 말하는 양심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 대한 지각으로 죄를 숨기지 못하게 하는 내적 증인과 심판의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청교도 신학자인 윌리암 퍼킨스는 양심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대리자(관원)이자 부재판관’이라고 하였습니다.

로이드 존즈는 양심은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두신 내적 감시자 또는 도덕적 감지기’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 자신의 행동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인지 옳지 않은 일인지를 판단하는 내면의 의식을 심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양심이라는 말입니다.

웨스트민스터대요리문답 제92문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순종의 법칙으로 처음 계시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묻고 “무죄의 상태에 있는 아담과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류에게 계시하신 순종의 법칙은, 선악을 하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특별한 명령과 도덕법이었습니다.”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순종하도록 주신 것이 두가지인데, 첫째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것이요, 둘째가 도덕법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지켜야 한다고 주신 도덕법을 인간 내면에 적용하고 판단하는 작용을 하는 곳이 양심입니다. 그래서 양심은 하나님께서 주신 도덕법 자체는 아니나, 인간의 마음에서 도덕법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기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함으로 이 양심은 온전하게 보전되지 못하고 오염되었습니다.

1) 범죄 이전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양심은 하나님의 도덕법을 왜곡 없이 비추는 거울이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하여 타락함으로 인간의 양심은 오염되어서 여전히 작동하기는 하나 때때로 악을 선이라 하고, 선을 악이라 하는 오염된 양심이 되었는데, 성경에서는 ‘양심이 더러워졌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더러워진 양심에 대해서 디도서 1장 15절에서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 “양심이 더러운지라”는 말씀은 사람의 양심이 죄로 인하여 오염되어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반복적으로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할 때 그의 양심은 그것이 잘못이라고 책망하나 그 양심의 소리를 무시할 때 죄가 점점 더 자연스러워지고, 그로 인해 선과 악을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여 도덕적 감각이 오염되고 왜곡되는데, 그 상태를 성경에서 ‘더러운 양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그래서 ‘더러운 양심’은 판단력이 흐려져서 때로 ‘선을 악하고 하고, 악을 선하다’하며 죄를 합리화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감각 기능의 저하로 인하여 분별력을 상실한 사람과 같다하겠습니다. 입맛을 잃은 사람이 음식의 맛을 정확하게 분별하지 못하고, 시력이 아주 나빠진 사람이 명화와 낙서를 구별하지 못하고, 청력이 떨어진 사람이 아름다운 음악 소리와 소음을 바르게 구별하지 못하듯이 범죄함으로 더러워진 양심은 선과 악에 대한 판단 기준이 흐려짐으로 선을 악하다하고, 악을 선하다 하며, 또한 악을 가볍게 여기며, 죄에 대하여 민감하지 못하고, 죄에 익숙해지며, 죄책감이 약해지고, 죄를 합리화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3) 여기서 더 나아가서 ‘더러워진 양심’을 방치하면 ‘화인 맞은 양심’이 됩니다.

죄를 지을 때 찾아오는 양심의 가책을 계속 억제하게 되면, 양심의 감각이 둔화되어서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고 마음이 완고해지는 ‘화인 맞은 양심’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 화인 맞은 양심에 대하여 디모데전서 4장 2절에서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화인(火印), 곧 불 인두로 피부에 낙인을 찍으면 신경이 완전히 죽어버려 마비된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양심에 화인을 맞았다는 말은 죄를 지어도 이제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더 이상 어떤 양심의 가책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양심이 화인을 맞으면 죄를 자랑하고 권장하기까지 하는 상태로서, 하나님께서 그를 상실한 마음 상태로 내버려 두신 상태입니다.

이 화인 맞은 양심은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가 없으면 절대로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가장 악한 양심의 상태가 바로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

4. 모든 사람이 더러워진 양심에서 회복되어 깨끗한 양심을 소유해야 하는데, 그러나 이 일은 사람 스스로 노력과 선행과 공로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1) 그래서 선행으로 죄책감을 상쇄하려는 시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더러워진 양심에서 벗어나야 마땅한데, 그러나 이 일은 사람의 힘과 노력으로 깨끗한 양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선행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일 뿐 과거의 죄를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선행으로 죄책감을 상쇄하려는 시도는 누더기 옷으로 상처를 가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선행을 하였으니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은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것입니다.

2) 또한 고행을 행하고 자기에게 스스로 벌을 내려도 더러워진 양심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스스로 고통을 가하거나 금식과 금욕, 과도한 종교적 의무에 매달려 마음을 짐을 덜고자 하는 것은 자기 위안일 뿐이지, 더러워진 양심이 깨끗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스스로 양심의 가시를 뽑으려 하면 할수록 가시는 더욱 깊이 박힐 뿐입니다’.

3) 뿐만 아니라 바쁘게 일에 몰두하거나, ‘누구나 이정도 허물과 실수는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해도 더러워진 양심을 깨끗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일에 몰두하면 잠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뿐이지, 급한 일에서 벗어나면 양심은 다시 작동하고, ‘누구나 이 정도 허물과 실수는 하기 마련’이라고 말해도 그 양심이 화인 맞아 감각 없는 양심이 아니라면, 그 양심은 여전히 네가 하나님의 도덕법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고 그 사람을 정죄하며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할 뿐입니다. 사람의 이런 저런 노력과 방식으로는 절대로 더러워진 양심에서 스스로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더러워진 양심은 오직 그 양심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만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선행이나, 고행이나, 잘못에 대하여 스스로 벌을 준다할지라도, 그런 행동은 오염된 그 사람의 양심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지, 그런 행동이 양심을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5. 더러워진 양심에서 깨끗하게 되는 방식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씻길 때만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더러워진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 뿐입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에서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는 것 곧 죄로 더러워진 양심에서 ‘깨끗한 양심’이 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된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더러워진 양심이 깨끗한 양심이 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리스도의 피로 양심이 씻음을 받음으로 더러운 양심이 깨끗한 양심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은 양심이 깨끗한 양심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진 양심은 이제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회복된 양심입니다.

6. 사도 바울은 이 깨끗해진 양심이 ‘믿음의 비밀을 담는 그릇’도 되고 또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1) 깨끗해진 양심이 믿음의 비밀을 담는 그릇이라는 것을 디모데전서 3장 9절에서 집사의 자격을 말씀하시면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믿음의 비밀”에 대하여 성경학자들은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라고 말하는데,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은 깨끗한 양심 곧 회복된 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와 그 진리를 확신하고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는 믿음의 비밀을 담는 그릇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어 깨끗한 양심으로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확신하고 그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이 주님을 섬기는 일꾼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2) 또한 바울 사도는 디모데후서 1장 3절에서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라고 가르침으로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청결한 양심”이라는 말씀도 디모데전서 3장 9절에서 가르친 믿음의 비밀을 담는 그릇인 “깨끗한 양심”으로 번역된 말과 똑같은 헬라어 ‘카타라 쉰에이데시스’입니다. 한번은 “깨끗한 양심”으로 한번은 “청결한 양심”으로 번역했을 뿐이지, 원어는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에 합당한 양심은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은 깨끗한 양심을 소유한 자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은혜로 거듭나지 않은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간혹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 중에서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보다 선한 일을 더 많이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평생 모은 재산을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재단을 만들어 기부하거나, 고아원과 양로원에 자신이 모든 전 재산을 기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일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양심인 깨끗한 양심을 따라서 행한 일이 아니라면, 자신의 생명을 남을 위해서 불사르게 내어 준다하여도 본성을 따라서 행한 그 일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최선을 다해서 선을 행하다 죽는다 하여도 그 죽음은 자신의 죄로 인해서 당하는 죄의 형벌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은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 없이 그 모든 계명에 완전히 순종하되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의 수준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창조하신 처음 사람은 이런 의를 이룰수 있는 자들로 만드셨기에 이런 의를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한 아담의 후손은 아무도 이 수준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후손이 최선을 다해서 선을 행하여 하여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을 이룰 수 없는 것이고, 그리스도 밖에서 행하는 그 어떤 일도 자신을 죄에서 구원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7.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선한 양심”은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은 ‘깨끗한 양심’을 말합니다.

깨끗한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선을 행하고자 할 때, 그 양심은 선한 양심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6절의 말씀과 같이 “선한 양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행”으로 나타납니다.

1) 여기 “선한 양심”이라는 말에서 ‘선한’도 헬라어 ‘아가토스’이고, “선행”곧 ‘선한 행실’에서 ‘선한’도 헬라어 ‘아카토스’인데, 이 단어는 구약에서 ‘좋다, 선하다’는 뜻의 ‘토브’라는 단어였습니다.

구약에서 ‘선한’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창조와 출애굽과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일, 가나안을 정복하여 주시고 그 땅에 살게 하신 일, 성령을 부어 주실 일 등이 선하고 좋은 일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0:17)라고 묻는 부자 청년에게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마 10:18)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신구약에서 ‘선하다’는 말은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된 단어이고, 선하신 하나님을 닮아가고 또 그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에게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선하다’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은 양심이 ‘깨끗한 양심’인데, 이 깨끗한 양심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그 양심을 “선한 양심”이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2) “선한 양심”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성도들이 행하는 선한 행실을 통하여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한 행실’을 하려고 애쓰기 전에 먼저 “선한 양심”으로 무장되는 일 곧 그리스도 안에 가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늘 거하여 그 뜻대로 순종하여 살기 원하는 “선한 양심”으로부터 ‘선한 행실’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였는데,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이것이 선한 양심을 따라 행하여 선한 열매를 맺는 비결입니다.

3)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한 양심을 가지는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베드로 사도가 베드로전서 2장과 3장에서 가르친 교훈을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선한 양심을 가진 성도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몇 가지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①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 곧 율법을 행할 의무와 율법을 행하지 못하는 자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죄의 형벌에서의 자유를 주셨는데, 그 자유로 죄를 가리는데에(죄의 핑계거리와 죄를 합리화하는 것)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종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섬기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양심”을 가진 모습입니다.

② 또한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피를 흘려 우리를 구원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삼아주신 것을 인하여 이제 나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라는 것을 기억하고 사는 것이 “선한 양심”을 갖고 있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③ 뿐만 아니라,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는 것이 “선한 양심” 곧 주님과 동행하는 구원받은 성도의 양심을 따라서 행하는 일입니다.

8. 성도가 “선한 양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선행”할 때 성도를 핍박하는 자들은 성도의 “선행”을 “비방”하나 결국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성도의 선행에 칭찬과 인정을 하지않고 “비방”하는 자들이 당하는 “부끄러움”은 2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도를 박해하는 자들이 이 땅에서 성도의 선행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비방한다 할지라도 성도의 선행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아름다운 열매들이 박해하는 자들이 정당하지 않은 것임을 드러내어 그들을 부끄럽게 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모함과 비방을 받고 사자 굴에 떨어졌으나,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살아 나온 그 일 자체가 다니엘을 비방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증거였습니다.

둘째는, 성도들을 박해하고 성도들의 선행을 비방한 자들은 내세에서 영원토록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선인과 악인을 심판하시는 그 때에 성도들이 “선한 양심”을 따라서 행한 ‘선한 행실’을 비방하는 자들은 정죄를 받고 지옥 형벌에 떨어짐으로 영원토록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9.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선한 양심을 따라서 살아갔습니다.


1) 야곱의 아들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꿈, 곧 비전을 따라서 살되 죄와 타협하지 않고 선한 양심을 따라서 악을 행하지 않고 감옥에 들어가기까지 하였습니다.

야곱의 형들의 미움을 받아 미디안 상고, 곧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은 20에 노예로 팔려간 후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다시 팔렸고, 요셉이 그 집에서 충성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요셉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고 보디발이 가정 총무를 삼았습니다.

만일 요셉이 형들에 의하여 애굽 사람에게 노예의 신분으로 팔린 것을 인하여 불평하고 원망하는 삶을 살았다면, 절대로 하나님께서 요셉의 범사를 형통케 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노예로 팔린 신분에서도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믿음과 꿈을 붙들고 선한 양심을 따라서 선을 행하였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할 때조차 그는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라고 말하며 ‘선한 양심’을 따라 행하여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죄를 범하지 않음으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는데, 그것이 “선한 양심”을 따라서 행한 ‘선한 행실’이었습니다. 감옥에서 요셉은 낙심하지 않고 믿음을 따라 살아갔기에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며 감옥에서도 형통하게 하셨고,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준 후 바로가 꿈을 꾸었을 때, 술 맡은 관원장의 추천으로 꿈을 해석하고 애굽의 총리가 되어 하나님께서 그에게 꾸게 하셨던 꿈대로 그 아버지와 형제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2) 바사 왕 다리오 때에 왕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기도하지 말라는 조서가 반포되었으나 그 조서를 어기고 기도하다 사자 굴에 떨어진 다니엘도 “선한 양심”을 따라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자신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자들이 다리오 왕을 설득하여 왕 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조서를 반포하게 한 것은,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자들의 악한 모략인 것을 알았으나, 그는 일평생 자신과 함께 하신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기도하였습니다. 결국 사자 굴에 떨어졌으나 하나님은 사자 굴에서 다니엘을 건져 주셨습니다.

3) 신약의 사도 바울도 선한 양심을 따라서 행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3장 1절에서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여기 바울이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라고 말할 때 “양심”은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의 증거를 위해서 순종한 “선한 양심”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선한 양심”을 따라 복음 전파를 위해서 많은 고난과 환난에도 불구하고 오직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3장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의 폭동을 인하여 군인들에게 체포된 후 공회 앞에서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일이 있기 전에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환난과 결박이 기다린다는 것을 성령께서 각 성에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증거하게 하셨으나, 그는 선한 양심을 따라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복음을 전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사도행전 20장 22절로 24절에서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생명의 안위보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 더 중요하였고, 그 일을 위하여 “선한 양심”을 따라서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었습니다.

10. 저와 여러분 모두도 “선한 양심”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행” 곧 ‘선한 행실’을 실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베드로 사도가 가르친 선한 양심을 따라 선을 행하라는 것을 표현을 바꾸어서 디모데전서 6장 12절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한 “선행” 곧 ‘선한 행실’이 바울 사도가 말하는 “선한 싸움”입니다. ‘선한 행실’을 “선한 싸움”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성도의 ‘선한 행실’은 악한 세상과 대적자들 앞에서 행하는 영적인 전투이기 때문에 “선한 싸움”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피로 더러워진 양심을 씻어 깨끗한 양심을 가진 저와 여러분 모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행실을 행하는 이 일은 우리의 선하신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지으신 적이 없으시니 예수님은 항상 ‘깨끗한 양심’을 소유하셨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선한 양심”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양심은 항상 깨끗하고, 항상 “선한 양심”이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죄인의 구원을 위한 대속을 이루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고, 하나님의 아버지의 구원 계획을 완전히 성취하셨으며,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지옥 형벌에서 건지셔서 영원한 하나님이 자녀와 천국 백성을 삼으시고, 영원한 영생의 구원을 주셨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의 사건이야말로 우리가 닮아야 하는 최고의 “선한 양심”에서 나온 최고의 ‘선한 행실’이었습니다.

2)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앞서 살펴본 대로 범죄함으로 더러워진 양심을 회복시키시는 유일한 방편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비되고 오염된 우리의 양심을 다시 작동하게 만드는 방편이요, 능력입니다. 십자가가 없다면 인간의 양심은 이기적인 욕망에 빠지던지, 아니면 죄로 인하여 당하게 될 심판의 공포로 두려워 떨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깨끗한 양심을 갖게 된 성도들에게 선을 행할 동기와 자유를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 저와 여러분 모두는 죄의 형벌에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우리도 선을 행할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셨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여 나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지 않고, 우리로 선한 양심을 따라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선한 행실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사랑과 구원을 알지 못하여 믿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서 떨 수밖에 없으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성도들은 감사와 가쁨으로 주님을 따라서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3) 선한 싸움을 싸운 자들에게는 상급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로 8절에서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더러운 양심을 씻어 깨끗해진 양심을 소유하게 된 성도들은 동시에 죄에서 구원받은 천국 백성들입니다. 이 은혜를 생각하면 그리스도를 닮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기를 갈망하는 “선한 양심”을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선한 행실 곧 선한 싸움을 싸운 자들에게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게서 “의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4)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닮아서 선한 양심으로 선행, 곧 선한 행실을 행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행 23:1)길수 있었던 것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씀한 것처럼,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주님이 바울 안에 함께 사실 때 “선한 양심”을 따라 “선행” 곧 ‘선한 행실’을 행할 수있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심령 속에 이 소망을 더 충만케 하시고 날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주의 말씀대로 순종하기를 갈망하는 “선한 양심”을 따라 날마다 주의 영광과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를 위해서 선한 행실, 곧 선한 싸움을 싸우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게 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