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예배 베드로전서 강론(23)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베드로전서 3장 14절로 17절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 지난주에 베드로전서 3장 13절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은 모두는 “열심으로 선을 행”하여야 하는 자들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열심으로 선을 행”하여야 하는 자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선을 행하되 열심으로 선을 행하여야 하는 자들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서신을 받아 보던 성도들은 기독교가 로마에서 믿어도 되는 공인된 종교가 아닌 때였기에 고난과 핍박이라는 박해를 피할 수 없는 자들이었고, 그 성도들 중에 대다수는 상전 아래서 종노릇하는 노예의 신분에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성도들을 향하여 베드로 사도는 “열심으로 선을 행”하여야 하는 자들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되며, 실제적으로 “열심으로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은 노예가 아닌 자유민이요,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 선진국 반열에 오른 나라의 국민으로서 또한 이 시대가 진지한 것을 싫어하고 인위적으로 강한 자극을 찾아 도파민 수치를 높이려하고, 오직 인생의 즐거움과 안락함만을 추구하는 시대를 알게 모르게 살고 있는데, 이런 시대 사람들에게 열심으로 선과 의를 행하고, 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은 그리 환영을 받는 주제가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세상을 닮아서 고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선과 의를 행하는 말보다는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원하는 소원을 이루어주신다고 말하는 기복주의와 성공주의 설교에 더 많은 사람들이 반응하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의 외적인 성장이 목표인 목회자라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라는 본문을 굳이 설교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은 우리에게 너희가 어떤 구원을 받았고, 그 구원에 비추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자인지를 항상 기억하고 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성경은 저와 여러분이 구원받은 목적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엡 2:10)라고 확정하여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우리가 받은 놀랍고 영광스런 구원과 그 구원에 걸맞는 성도의 삶,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가 가르쳐 주시는 대로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삶이 복된 삶인 것을 깨닫고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14절 상반절의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라는 말씀은 앞 구절인 13절의 “열심으로 선을 행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열심으로 선을 행하”는 삶은 ‘의를 행하면서 고난을 받는 삶’이기도 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살펴 볼 때에 주의 성령께서 잘 깨닫게 하시고, 저와 여러분 모두도 “열심히 선을 행하”는 삶, 곧 ‘의를 행하면서 고난을 받는 삶’을 기쁘게 여기며 이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성숙한 성도, 곧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2. 오늘 본문 14절에서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모든 성도에게 베드로 사도는 왕과 권세자들에게 순종하고, 종들은 주인에게 순종하되 부당한 고난을 당해도 우리를 대신하여 부당한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생각하고 슬픔을 참으면 아름답다고 하셨고, 이 은혜의 원리를 따라서 아내는 남편에서 순종하고, 남편도 지식을 따라서 아내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한 믿는 형제를 향하여서는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벧전 3:8)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었으며, 믿는 성도를 향하여 악을 행하고 욕을 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벧전 3:9)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이렇게 선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악을 행하고 욕을 하는 자들이 있다는 말인데, 선과 의를 행하며 칭찬과 보상이 아닌, 악행을 당하고, 욕을 먹는 것이 바로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선과 의를 행하다가 받는 이 고난이 도리어 복이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2) 그러나 성도가 당하는 모든 고난이 다 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살펴 본 베드로전서 2장 20절에서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죄를 짓고 매는 맞는 고난은 복이 되는 고난이 아니라, 죄에 따른 형벌이요, 수치일 뿐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의 첫 성인 여리고를 정복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 성의 모든 것을 여호와께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 6장 17절로 19절에서 “17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18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19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하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간이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물건 중에서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수 7:21) 장막 가운데 땅 속에 숨기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께서는 여리고와 비교할 수 없이 작은 아이성을 칠 때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심으로, 이스라엘이 그 전투에서 패배하여 36명이 전사하고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되었습니다. 결국 제비에 뽑힌 아간은 모든 가족과 그의 모든 재산과 소와 나귀와 양들까지 아골 골짜기에 끌려가 돌에 맞고 불사름을 당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탐심의 죄가 이스라엘 전체에게 고통과 수치를 가져왔고 아간과 그 집은 이 땅에서 자취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의 시종이었던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이 병을 고치고 엘리사에게 선물을 주고자 하였으나, 엘리사 선지자가 거절할 때 선지자 몰래 나아만을 따라가서 은 두 달란트와 의복 두벌을 받았는데, 그로 인해서 그는 나아만 장군의 치료 받은 그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5절에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여 받는 고난 곧 죄가 있어서 받는 고난은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하지 못한 고난이요, 이런 고난을 받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한 이름과 영광에 누를 끼치는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는 그리스도의 존귀한 이름에 합당한 선한 삶 곧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3. 그러면 성도가 이 세상에서 의로운 일을 행할 때 고난을 받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성도가 선하고 의로운 일을 하면 세상 사람들도 알아주고 칭찬하고 상을 줘야 할텐데 도리어 선과 의를 행하는 성도들이 핍박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도가 선과 의를 행함에도 고난을 받는 이유는 성도의 선하고 의로운 행실이 세상을 해롭게 하거나 어떤 피해를 주기 때문이 아니라, 성도가 선과 의를 행할 때 세상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는 이유는 세상이 악하고 타락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1)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세상이 타락하고 악한 자인 사탄의 권세 아래 있다고 요한복음 15장 18절로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세상이 선과 의를 행하는 성도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은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차별을 합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고 차별하고, 사는 나라와 지역이 다르다고 차별하고, 같은 민족이 아니라고 차별하고, 심지어 입는 옷과 먹는 음식이 다르다고 차별합니다.
그러나 최고의 차별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에 속한 자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차별하는 것이 최고의 차별입니다.
2) 아담의 범죄 이후 세상은 오직 두 부류의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과 마귀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이렇게 인류가 두 부류로 구분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범죄한 이후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원수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 13절로 15절에서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뱀 곧 사탄에게 너와 여자로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너”는 사탄 마귀요, “네 후손”은 공중 권세 잡은 사탄에게 속한 자들을 말씀하는데 에베소서 2장 1절로 2절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공중 권세 잡은 사탄 마귀를 따라 사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들이 사탄의 후손들로써 사탄 마귀와 그에게 속한 자들이 한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고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을 자랑하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형통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하더라도 사탄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뱀 곧 사탄과 사탄의 후손 그리고 여자와 여자의 후손으로 원수가 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탄과 사탄에게 속한 자들과 원수 관계에 있다고 하시는 여자와 여자의 후손은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일차적으로 여자는 하와를 말씀하나, 하와가 상징하는 여자는 계시록 12장에서 말씀하는 대로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 곧 그리스도를 낳은 교회를 말씀하시는 것이며, 또한 여자의 후손은 갈라디아서 4장 4절에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고 말씀하신 대로 일차적으로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나, 참 여자의 후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된 모든 성도들이 또한 여자의 후손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6절로 29절에서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로 옷 입”어, “그리스도의 것”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인 저와 여러분이 여자의 후손입니다.
이렇게 여자의 후손인 저와 여러분은 사탄의 후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과 원수 관계에 있다고 성경이 말씀하시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범죄 때문입니다. 죄를 범하여 타락한 자들 모두, 곧 죄와 허물로 죽은 아담의 후손 모두가 사탄에게 속한 자들이었는데,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았고, 또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여 내신 자들이 되었기에 그들과 원수 관계에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3) 하나님의 백성과 마귀의 백성 곧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첫 번째 충돌 사건이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인 사건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한 마디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는 자기보다 더 나은 제사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린 의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자요, 어둠의 권세에 속한 자들은 의로운 일과 그 의로운 일을 행하는 의인들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미워하냐면 죽일 만큼 미워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이 교회를 잔멸하려는 악한 궤계를 막지 않으셨다면, 벌써 세상은 교회를 세상에서 없애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이 아무리 날뛰어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범위를 넘어서서 성도를 해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시편 76편 10절에서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사람의 분노나 악행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일 정도까지만 허용하시고, 그 선을 넘는 “남은 노여움”은 하나님께서 철저히 금지하신다는 말입니다.
4) 의로운 제사를 드린 아벨을 죽인 세상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을 핍박하였습니다.
방주를 짓던 노아도 세상에서 외톨이였고,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의로운 다윗도 오랫동안 사울 왕의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와 허물이 아니어도 세상으로부터 많은 미움과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선과 의를 행할 때, 사탄 마귀의 권세 아래 있는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추구하는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따라 가는 삶이 악하고 초라하게 보이기에 선과 의를 행하는 성도들을 미워하고 핍박한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4장 3절로 4절에서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4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이 선과 의를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고 비방하고 핍박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성도들을 비방하고 핍박하는 이방인들의 삶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과거에는 이 편지를 받아보던 성도들도 똑같은 삶을 살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지 않는 모습을 보고서, 왜 지금은 성도들이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한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악한 모습과 비교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볼 때 자신들의 악과 추함이 들어나니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밝은 등불 아래에서는 옷에 붙은 작은 티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처럼, 악인들은 성도들의 선한 모습을 보고서 자신들의 악과 추함이 드러나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서 성도들을 미워하고 비방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4. 그러면 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과거와 같이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않고, 이제는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하는 삶은 더 이상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6절로 38절에서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아 의롭다 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얻고, 성령께서 구원의 기쁨과 감격 속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시고 또한 장차 지옥 형벌을 면할 뿐 아니라, 영원한 본향에서 주와 더불어 누릴 하늘의 영광 때문에,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여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결박하여 옥에 가두고, 또한 성도들이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아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그 모든 어려움을 기꺼이 이겨낸다는 말입니다.
조롱과 채찍질과 결박당하여 옥에 갇히는 것을 넘어서서 갖은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고,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유리방황과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아도 끝까지 믿음을 지킨 이유는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리라”는 말씀을 영어 성경에서는 “the world was not worthy of them.”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본래적인 뜻은 ‘세상은 그들에게 값어치가 없다’라는 뜻입니다. 하늘의 영광과 가치에 눈을 뜨게 되니, 잠시 세상에서 누리는 죄악의 영광은 사람을 영원토록 지옥 형벌에서 망하게 하는 삶인 것을 깨닫게 되자, 그 세상이 이제 참된 성도들에게는 아무런 값어치가 없는 것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5. 만일 성도가 고난이 두려워서 세상과 똑같이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과거와 똑같이 살아간다면 세상으로부터 어떤 미움과 비방과 박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나,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은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 21절로 22절에서 “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이 말씀은 성도들을 향하여 주시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성도에게 이런 모습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 말씀하고 있는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는 자들이 있다면, 이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 거듭나 의롭다하심을 입은 참된 성도인 하나님의 자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에 대해서 청교도 주석가 매튜 풀은 ‘마음의 참된 변화에 까지는 이르지 못한 채 외적인 삶의 변화를 수반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라는 말씀은 개가 먹기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먹었다는 것을 깨닫고 토하여냈다가 다시 그 것을 먹는다는 말인데, 이 말은 비유로서 어떤 사람이 영적으로 죄에 대한 각성을 받아서(진정한 회심은 아님) 잠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하고 죄를 버리는 것 같았으나, 그러나 그 본질이 변하지 않았기에 - 완전히 거듭난 참 성도가 아니기에 - 개가 그 토한 것에 돌아가 그것을 먹는 것과 같은 과거의 죄악된 삶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그의 영혼에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기에 죄의 각성을 받아서 잠시 동안은 그 죄를 멀리하는 것 같으나, 거듭난 성도가 아니요, 그 속에 은혜의 원리가 없고, 또 성령께서 죄를 버리는 성화의 삶을 살도록 은혜로 주장하지 않으시니, 잠시 죄의 각성으로 끊었던 죄에 다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칼빈은 이런 상태를 기독교강요 3권 2장 11절에서 참된 믿음이 아닌 ‘일시적인 믿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바울 사도가 로마서 8장 15절에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지 못한다(기독교 강요 3권 2장 11절)라고 하였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구원받지 않은 자들처럼 살 수 없습니다. 거듭난 성도가 선과 의를 행하지 않고 뒤로 물러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를 바로 세우시기 위하여 징계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징계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받은 은혜를 인하여 저와 여러분 모두는 선과 의를 행하기를 기뻐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6. 우리 주님께서도 오늘 본문 14절에서 말씀하시는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고난에 대해서 마태복음 5장 10절로 12절에서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으면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주님께서는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핍박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런 일은 아무에게나 허락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아 의롭다하심을 입어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된 성도들에게 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가르치다가 옥에 갇히고 매를 맞았으나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사도행전 5장 40절로 42절에서 “40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유대의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들은 사도들에게 이제부터는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경고와 함께 채찍으로 그들을 때리고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나, 그러나 사도들은 그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고, 그 후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7. 저와 여러분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때 적극적으로 기뻐하고 즐거워 해야 할 뿐 아니라, 소극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1) 앞서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난 후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고 성경이 말씀하였는데, 사도들이 기뻐하며 복음을 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받은 구원 때문이요, 장차 천국에서 받을 상급 때문입니다. 또한 나를 사랑하사 나를 대신하여 죽기까지 그 사랑을 확증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사랑을 드러내는 방식이 복음을 전하며 고난과 핍박이라는 박해를 당하는 것이었기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면 기뻐하고 즐거워 할 일입니다. 주님을 위한 고난,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내가 구원 받은 성도라는 사실과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충성을 드러내는 일이기에 기뻐하고 또한 즐거워 해야 하겠습니다.
2) 성도들이 고난과 박해를 받을 때 소극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악에 대하여 복수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2006년 덴마크 신문에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를 풍자한 만화가 게재되자, 이를 인하여 전혀 상관도 없는 나라인 나이지리아에서 북부 무슬림들이 남부 기독교인들의 교회를 공격하여 교회 수십 곳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러자 분노한 기독교인들이 이슬람 사원에 불을 지르고 무슬림을 공격하는 참혹한 보복전이 일어나 수 일 만에 양측에서 수백 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부당한 고난을 받을 때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때에도 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7절과 19절로 21절에서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는 말씀은 복수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복수는 감정에 치우쳐서 공정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악에 대한 방관이 아니라, 가장 완벽한 심판자에게 이 사건을 이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악에게 지지 않는 것은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8.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라고 하십니다.
1) 첫째로 이 복은 천국의 복입니다.
앞서 마태복음 5장 10절로 12절에서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라는 말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자의 복”, 오늘 본문이 말씀하시는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때 받게 되는 복’은 영적인 복입니다.
이 영적인 복에 대해서 마태복음 5장 10절에서는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고, 12절에서는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베드로전서에 기록된 말씀으로 설명을 하자면 1장 4절에서 말씀하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는 복, 곧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영생의 복을 말씀합니다.
이 서신을 기록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실 때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라고 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일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른 이유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왕이 되시면, 그 다음 자리를 차지할 소망을 가지고 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목격하고 오순절 성령의 충만을 받자, 세상에서 예수님 다음의 높은 자리를 구하며,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대제사장의 종이었던 말고에게 칼을 휘둘러 그의 귀를 자르던 사람이 변하여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과거에는 세상이 전부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의 강림의 사건을 경험한 후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될 때, 자신이 돌보고 있는 양 무리들을 향하여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영원한 영원의 나라를 물려받는 복을 누릴 뿐 아니라, 그 나라에서 주실 상급을 바라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 베드로는 이제 이 세상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오직 주께서 승천하신 하늘에서 주와 함께 누릴 영생의 소망과 주님이 충성한 자들에게 주실 상급만 바라보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베드로 사도와 같아지기를 소원합니다.
2) 또한 이 복은 의를 행하다 고난을 받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일꾼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인 것을 드러내는 복입니다. 성도가 의를 행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고난을 감수하는 것은 이미 받은 구원의 은혜 때문인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그리스도를 닮아 의를 행하고 고난을 받을 때 원수갚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16장 24절)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하려는 참된 성도인 것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9. 끝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의를 위한 고난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또한 어떻게 할 때 의를 위하여 기쁘게 고난을 받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가 받아야 할 의를 위한 고난은 사도가 지금껏 가르쳐 준 대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가지고 선과 의를 행하는 것이며, 선과 의를 해할 때 찾아오는 고난을 참고 이기며 먼저 고난을 받으사 우리에게 본을 끼치신 예수님의 자취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성도는 왕과 권세자들에게 순종하고, 믿는 아내는 남편이 사랑하지 않아도 순종하는 것이며, 믿는 남편은 아내가 순종하지 않아도 지식을 따라서 아내와 동거하고 귀히 여기며, 형제를 사랑하고, 우리에게 악을 행하고 욕하는 자들에게 그대로 갚지 않고 복을 비는 삶을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자의 삶인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삶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친구와 친척 또는 회사 동료들에게 복음의 절대성을 증거 할 때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편협한 사람이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와 같이 피를 흘리는 박해는 아니나, 평판과 명예에 훼손을 당하는 부드러운 형태의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사회생활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직과 의를 따르다가 조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이런 저런 손해를 받게 되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고난을 기쁘게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2) 끝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서 의를 위한 고난을 기쁘게 받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와 영광으로 충만해야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삶을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같이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하루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영광으로 충만한 하루를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로 시험에 들게 하는 일과 낙심케 하는 일을 만날 때마다 주의 은혜로 붙들어 주시고,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잃어버리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어느 영화에 보니 주인공이 자동차 사고를 당하여 사고 전날까지 기억은 있는데, 사고 이후 하루가 지나면 전날 기억이 사라지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주인공은 아침에 눈을 뜨면 전날 메모해 놓은 것을 읽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학교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을 새롭게 만났는지, 그 사람의 이름과 있었던 일을 꼼꼼히 기록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전날 메모를 꼭 읽고 학교에 가는 내용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제 사귄 친구가 인사를 해도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은혜와 복을 주셨는지를 충분히 기억하고 하루를 시작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주일에만 예수님 생각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주일만 성도로서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세상 일로 바쁘게 살아가면서 내가 받은 구원의 은혜와 감격을 잊고 산다면,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3장 1절에서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자 곧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의 신분을 얻을 자들로서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는 “위의 것을 찾”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3절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저와 여러분은 죄와 이 세상에 대하여 이미 “죽었고” 또한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천국 백성이기 때문이요, 4절에서는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곧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기뻐하는 성도의 복은 주님 다시 오시는 날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서 밝히 보여 주실 것입니다.
이 산 소망을 따라서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되 기쁨으로 고난을 받으며 하늘에서 주실 복과 상급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