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AT JOONGSIM

강의안

말씀을 배우고 삶으로 나누는 자료입니다.

주일 낮예배 베드로전서 강론(20)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베드로전서 3장 8절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1. 오늘도 주의 말씀 상고할 때에 성령님께서 잘 깨닫는 은혜를 주시고 이 말씀에 소망을 두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게 하시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성화의 삶입니다. 때로 우리 인생길에서 앞날이 계획대로 되지 않고,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 것 같고 낙심과 절망이 때로 찾아 올수도 있으나, 신명기 29장 29절에서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라는 말씀처럼, 감추어진 일들 곧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는 앞 날의 일들은 내게 속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속한 것이니 그것을 알려고 하지 말고, 오늘 우리에게 속한 나타난 일 곧 “율법의 모든 말씀”대로 순종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저와 여러분에게 속한 일이요,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의 성공적인 삶인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믿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본분과 목적은 큰 빌딩을 세우고, 많은 돈을 벌어서 큰일을 이루는 것 이전에 하루하루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광포되는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 오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오늘 증거되는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는 자녀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를 이루어가는 자들이 되게 하기기를 소원합니다.


2. 오늘 본문은 “마지막으로 말하노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 여기서 ‘마지막’이라는 말씀은 베드로전서를 마무리하는 결론으로서 마지막이라는 말도 아니며, 마지막 인사말로서 마지막이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전서 2장 16절에서 “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라고 하신 말씀대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서 주신 자유를 가지고 행하여야 할 일들을 말씀해 오던 중에 권세 아래 있는 자들과 아내들과 남편들에게 교훈을 주신 후 이제 이 단락의 결론으로서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믿는 형제와 그리스도 밖에 있는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를 교훈해 주시고 있는 마지막 교훈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성경이 성령으로 영감 된 말씀이라고 하면서 왜 “마지막으로 말하노니”라고 말씀하시고서 이 단락을 끝난 후에도 베드로전서가 5장까지 계속되는가라는 의문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2) 베드로 사도가 가르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는 2 가지인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는 율법을 지킬 의무에서의 자유이며, 둘째로는 율법을 어긴 자들에게 임하는 저주 곧 율법을 지키지 못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공의의 법인 율법은 죄 있다고 정죄하는데, 그 정죄로 인한 죄의 책임에서 벗어나 죄로 인한 형벌을 당하지 않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고, 율법을 지킬 의무와 율법을 지키지 못한 자에게 임하는 죄의 책임 곧 죄의 형벌을 당하지 않는 자유를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이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율법대로 살 수 없는 우리가 받아야하고 당해야하는 모든 저주를 그 아들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저주의 상징인 나무 십자가에 달리시어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시려고 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대신 저주를 받으사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지어도 형벌로서 지옥 곧 불못에서 영원토록 형벌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천국에서 주와 더불어 영원토록 생명의 교제를 누리게 되는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와 율법을 지키지 못할 때 주어지는 죄의 책임 곧 형벌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받았으나, 그 자유를 가지고 마음대로 죄를 짓는 자유자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은혜를 인하여,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되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서, 이제는 죄를 짓는 자유자가 아니라, 죄를 짓지 않는 자유, 죄의 유혹을 이기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참된 자유를 누리는 자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자유와 또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어도 상관이 없다는 참된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형제가 사도바울 자신이 고기를 먹는 것을 보고 실족하는 일이 있다면, 자신은 영원토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3) 이 참된 자유는 베드로전서 2장 25절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 온 삶이기도 합니다.

① 이 삶 곧 그리스도인이 참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다른 말로 하면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삶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가 두 가지로 가르쳐주었습니다.

첫째는 때로 성도들이 부당한 고난을 당해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부당하기 이를 데 없는 십자가의 저주의 고난을 당하심으로 고난의 본을 보여 주신 주님의 자취를 따라서 부당한 고난을 당하는 삶의 자리로 나가는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둘째로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자의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참 자유의 삶이요,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예수님께 돌아온 자의 삶이었습니다.

② 그래서 권세 아래 있는 자들은 권세자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까다로운 자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이 선을 행함에도 부당한 고난을 가하는 자들에게도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의 삶인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또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부당한 고난을 가하는 자들에게 맞대응하여 그 부당함을 호소하고 맞서 싸우고 싶지만, 그렇게 자신의 권리를 앞세우는 것은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온 삶, 곧 죄에 대하여 죄에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삶이 아니기에 부당한 고난에도 슬픔을 참고 선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③ 가정에서도 이 원리가 항상 적용되어야 합니다.

매일 얼굴을 대하는 가족들 사이에서도 참된 자유를 사용하여 그 자유로 나의 권리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족 곧 부모와 형제와 남편과 아내와 자녀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그 삶은 본성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죄에 대하여 산 자의 삶이 아닌, 죄악 된 본성과 세상과 사단의 유혹을 이기고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의 삶인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예수님께 돌아온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합당한 삶인 것입니다.

4) 오늘 우리가 읽은 베드로전서 3장 8절로 12절 말씀은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8절 말씀을 통해서 교회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동료 그리스도인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 가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9절로 12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과 외인 곧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방인들을 대할 때 성도가 어떤 모습으로 대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도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참 자유와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로 돌아온 삶이 원리를 가지고 교회 안의 형제를 대하고, 교회 밖에 있는 이방인들을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8절을 중심으로 교회 안에서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성도 사이에서 서로가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를 살펴보고 다음 시간에 9절로 12절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방인들에게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베드로 사도가 가르쳐 주시는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3.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3장 8절을 공동번역에서는 “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한마음을 품고 서로 동정하고 서로 형제처럼 사랑하며 자비심을 가지고 겸손한 사람들이 되십시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 뿐 아니라, 새번역, 표준새번역, 현대인의성경, 우리말성경 등 모든 한글 다른 번역에서도 8절을 9절과 연결하지 않고, 마침표를 찍어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8절에서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라는 말씀은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 곧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하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아니라면, 어떻게 한 마음을 품을 수 있고, 또 서로 동정하고, 서로 형제처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겸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8절 말씀은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교회 안에 지체들 곧 형제들을 향하여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시는 내용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 8절에서 교회 안의 모든 성도들에게 ‘마음을 같이하고, 동정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불쌍히 여기며, 겸손할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4. 성도 사이에서 실천해야 할 5가지 덕목 중에서 베드로 사도가 가르치는 첫 번째 덕목은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 “마음을 같이 하여”라는 말씀은 ‘영이 같다’ 또는 ‘혼이 같다’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마음과 정신과 원리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한 마음과 한 뜻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모든 일을 대하는 원리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성도 곧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나기 전 아담 안에 있을 때에는 각자의 욕심을 따라서 행하기 때문에 절대로 한 마음 한 뜻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자기 이익의 도구와 방편으로 생각하고,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절대로 한 마음 한 뜻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 새로운 피조물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4장 22절로 24절에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전히 그리스도 밖에서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에 머물러 있다면 절대로 한 마음 한 뜻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 곧 “새로운 피조물”인 그리스도인들은 한 마음이 한 뜻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2절로 1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방인과 유대인들 사이의 막힌 담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허물어뜨리시고, 이 둘 곧 이방인과 유대인을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지으시어 화평하게 하셨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방인도 유대인도 한 새 사람 곧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둘을 하나로 만드시되 유대인들을 이방인처럼 만들어서 한 새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방인들을 유대인들처럼 만들어서 한 새 사람을 만든 것도 아니고, 오직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당신께로 부르시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원수 사이였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어뜨리시고 한 새 사람 곧 그리스도인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한 마음 한 뜻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모두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일 때 한 마음 한 뜻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 한 마음 한 뜻을 이룬다는 말씀은 서두에 말씀을 드린 대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주신 참 자유와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온 삶을 살아갈 때 한 마음 한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5.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가 성도 사이에서 실천해야 할 5가지 덕목 중에서 두 번째로 가르치는 덕목은 “동정”하는 것입니다.

“동정하다”는 말은 헬라어로는 ‘숨파데스’인데서 ‘같이’라는 뜻의 ‘순’이라는 단어와 ‘겪다, 경험하다, 고생하다, 느끼다’는 뜻의 ‘파스코’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이 “동정하다”는 말은 ‘같이 겪다. 같이 경험하다. 같이 고생하다, 같이 느끼다’는 뜻입니다.

이 서신은 강론 첫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시작되었을 때 기록된 서신인 것을 살펴 본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며, 직장을 잃어버리고, 때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상전들에게 부당한 고난을 당하는 종들이 있었는데, 그런 형편에 처한 자들을 동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당하는 어려움과 고통을 마치 내가 당하고 겪는 고난과 핍박과 어려움으로 여기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도우며, 위로하는 것이 바로 형제를 동정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서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형제를 동정하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예수님을 닮는 삶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신 분으로서, 우리가 당하는 시험의 때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죄는 없으”신 분이라는 말씀은 모든 시험에서 죄를 범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 모든 시험을 이겨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주께서는 이 땅에서 성도가 당하는 모든 시험과 고난과 어려움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심지어 죄가 하나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에 박혀 죽으시면서까지도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벧전 2:22)신 분이셨으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벧전 2:23)실 때에도 죄를 짓지 않으신 분이셨습니다.

이 말은 죄와 피 흘려 죽으시면서까지 우리 주님은 범죄하지 않으시고 죄와 싸우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만큼 시험 앞에서 인간이 당하는 유혹과 고통을 잘 아시는 분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주님께서 우리를 동정하신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과 핍박과 고통 가운데 있는 성도들은 주님의 동정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히 4:16)가야 한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주님께 나아가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또한 연약한 성도들을 동정해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 간구하며, 또한 실제적으로 형제를 동정하는 삶인 그들을 찾아보고, 돕고, 위로함으로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성도의 아픔과 고통을 동정하는 것은 예수님을 닮는 일일뿐 아니라, 또한 주님의 한 몸 된 지체인 교회로서도 당연한 모습인 것입니다. 몸의 어느 한 부분이 아프면 온 몸이 함께 아파합니다. 손에 가시가 찔리면 가시에 찔린 손만 아픈 것이 아닙니다. 온 몸이 함께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다른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도 함께 나누어야 하지만, 특히 연약하고 부당한 고난을 당하며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동정함으로 우리를 동정하시는 예수님을 닮아갈 뿐 아니라, 주님을 머리로 하는 지체의 아픔에 함께 참여하는 주님의 한 몸 된 중심교회로 주님께서 든든히 세워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6. 베드로 사도가 성도 사이에서 실천해야 할 5가지 덕목 중에서 세 번째로 가르치는 덕목은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 앞서 살펴 본 “마음을 같이 하”는 것과 “동정하”는 것이 바로 형제 사랑의 방식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 뒤에 기록된 “불쌍히 여기며”, 그리고 형제 앞에서 “겸손”히 행하는 것이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신 4가지 실천 사항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2) 그런데 왜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향하여 “형제”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까?

① 로마서 8장 15절로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공동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하나님께서 양자 곧 자녀로 받아 주셨는데, 양자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에 내주하시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담대히 부르게 하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시고 또한 함께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을 형제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저와 여러분을 자녀로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하늘 아버지로 부르는 자들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또한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② 히브리서 2장 11절에서는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의 죄를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로서 죄를 씻어 용서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심으로 우리가 거룩한 자들이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연약하여 넘어지고 죄를 범하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의 값이 이미 완전하게 지불되었기에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고, 원리적으로 신분적으로 거룩하게 된 우리들이기에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20절로 21절에서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믿는 성도 곧 형제를 사랑하는 이 사랑은 피를 나눈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는 수준의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7. 베드로 사도가 성도 사이에서 실천해야 할 5가지 덕목 중에서 네 번째로 가르치는 덕목은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불쌍히 여기다”는 말은 헬라어로 ‘유스프랑크노이’라는 말로서 ‘좋은’의 뜻을 가진 ‘유’라는 말과 ‘심장을 포함한 내장’을 뜻하는 ‘스랑크나’를 합성한 형용사로서 그 뜻은 ‘좋은 스프랑크나를 가진’이라는 말입니다. 헬라어에서 ‘심장을 포함한 내장’을 일컫는 단어인 ‘스프랑크나’는 사랑과 긍휼의 원천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스프랑크나’ 곧 “불쌍히 여기다”는 말은 ‘애타는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다’, ‘내장이 끊어지는 아픔으로 측은히 여기다’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이 마태복음 18장 27절에서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라고 1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빚을 탕감해 주시는 임금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불쌍히 여겨”라는 말이 ‘스프랑크나’라는 단어 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사 갚을 수 없는 액수인 1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 주셨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받아야 할 그 1만 달란트의 빚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으시고 우리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 단어가 마태복음 9장 36절에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라고 하실 때 예수님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니”라는 말이 ‘스프랑크나’입니다.

주님은 길을 잃은 양떼,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죄악 된 길에서 유리방황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 곧 죄에 빠져서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받아 지옥에서 고통 받아야 할 자들을 보실 때, 애타는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셨고, 내장이 끊어지는 아픔으로 측은히 여기심으로 양떼를 위하여 대신 목숨을 버리시고 저주의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불쌍히 여기심은 이 세상의 모든 경우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심령 속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서로가 불쌍히 여겨야 하는데, 특별히 연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을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허락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형제 사랑이요, 성도 사랑입니다.

8. 성도 사이에서 실천해야 할 5가지 덕목 중에서 베드로 사도가 가르치는 다섯 번째 덕목은 “겸손”입니다.

형제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을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예수님의 성품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시던 창조주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실 때 모든 사람들 통치하는 가장 큰 나라의 왕으로 오시지 않으셨고, 자기 목숨을 모든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고 구원하러 오신 섬김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종의 자리로 오셨으나, 죄가 하나도 없으심에도 죄인 취급을 받으셨고, 죄인 중에서 가장 악한 흉악범을 처형하던 방식인 십자가에서 극도의 고통과 수치와 저주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믿는 죄인 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낮추심 곧 겸손이 어디 있습니까?

이 사실을 빌립보서 2장 1절로 4절에서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5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3절)는 마음이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빌 2:6-8)신 겸손하신 예수님을 닮은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겸손하시어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겸손할 수 있습니다.

일부러 꾸미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골로새서 2장 18절에서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꾸며낸 겸손은 주님이 가르치시는 겸손이 아닙니다. 참된 겸손은 내가 죄인임을 아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갚을 길이 없는 1만 달란트 빚진 종인데, 이런 자의 빚을 탕감해 주신 은혜를 기억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또 다른 성도 앞에서 겸손할 수 있습니다.

9. 오늘 본문에서는 베드로 사도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듣고 배운다고 실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심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며, 훈련을 통해서 선함을 이끌어 내는 방식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서두에서 말씀을 드린 대로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참 자유를 나의 유익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사용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온 자의 삶을 살아갈 때 교회 안에서 우리 모두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게 서로를 덕스럽게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된 자유를 바르게 사용하고, 또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예수님께 돌아온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충만할 때입니다.

성령께서 그 복음의 영광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실 때, 현재 우리의 삶이 어떤 고난과 아픔과 핍박이 있다 할지라도 나의 유익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덕과 형제의 유익을 구하고,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예수님께 돌아온 자로서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며, 참된 자유를 사용하여 부당한 고난을 기쁘게 당하고, 또한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 온 자의 삶인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로 살아갈 때에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게 서로를 섬기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런 은혜를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게 부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