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예배 베드로전서 강론(18) "아내들아 이와 같이...."
베드로전서 3장 1절로 6절
“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3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1.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아내들 곧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여성도들에게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날 남녀 간의 성 평등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데, 페미니스트 또는 여성인권운동을 하시는 분들은 오늘 본문에서 ‘아내들아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하시는 이 말씀은 그 시대에는 맞는 말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오늘 이 시대는 맞지 않는 말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는 아내들은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3절에서는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음으로 외모를 꾸미지 말라고 합니다. 5절에서는 거룩한 부녀들은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했다고 하십니다. 6절에서는 그 예를 들어서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을 주라고 칭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남편들에게는 7절에서 아내를 귀히 여기라고 말 할 뿐입니다.
페미니즘 입장에서 볼 때 이 말씀들은 1세기 로마 시대의 가정규범이 교회 안으로 들어 온 것이라고 설명을 하면서 ‘지금은 당시 같이 가장이 아내와 자녀와 노예에 대하여 절대적인권리를 갖는 가부장적인 시대가 아니며, 그 시대는 기독교가 로마의 체제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일 필요가 있어서 베드로 사도가 그렇게 말했을 뿐이요, 아내들에게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또는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고 칭했다는 표현은 그 시대에나 해당하는 말이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오늘날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견해’라고 말할 것입니다.
2. 그러나 성경은 어느 시대나 통용되는 진리를 말씀해 주시는 책인 것을 우리는 확실히 고백해야 합니다.
물론 성경이 기록된 시대적인 배경을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이 문자적으로 완전히 따라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중에서 의식 법을 완성하여 주신 복음의 시대에 우리는 구약의 백성들과 달리 음식의 정결규례에서 자유로운 자들이 되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는 예배에 참여할 때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하였으나, 그것은 당시 여인들의 정숙함과 결혼한 여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이었기에 합당한 일이었으나, 오늘 이 시대는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는다 하여도 정숙한 여인이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머리에 수건을 쓰고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영원한 영적인 원리가 아닌, 가변적인 관습이기에 사도 바울이 가르친 교훈이라도 이 시대는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를 향하여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하시는 말씀은 당시 로마의 가부장적인 전통에 순응하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가정에 주신 불변하는 창조질서에 속한 교훈인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 기초 위에서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아내들이 믿지 않는 남편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로서 마땅한 삶인지를 또한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1) 먼저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의 기준이 아니라 오직 성경을 유일한 나의 신앙의 삶의 기준으로 살아야합니다.
우리 교단이 공식적인 승인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12신조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12신조의 1번에서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이 나의 신앙과 본분 곧 나의 신앙과 삶의 정확무모한 유일의 법칙인 것을 고백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이 세상에서 불어오는 이런 저런 교훈의 풍조 속에서 갈대처럼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2)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영어로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부릅니다.
우리말로 하면 후현대사회 또는 탈현대사회라는 말인데, 현대 사회는 이성과 합리성으로 유지되던 시대를 말합니다. 포스트모던 시대를 기독교 용어로 바꾸면 후기기독교 사회, 또는 탈기독교사회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더 이상 성경의 교훈을 따르지 않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과거 현대사회라고 부르던 시대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이성과 합리성을 따라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기준을 가지고 살던 시대였습니다.
과거 우리나라 조선시대로 치면 유교의 사상인 삼강오륜이 사회 체제를 떠받치던 근간이었습니다.
서구에서 현대사회는 성경의 교훈을 따르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죄라고 규정한 것은 사회 구성원 중 그 누구라도 성경의 교훈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고, 그 교훈대로 살지 않는 것이 바르지 않은 삶이라는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살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후현대사회, 탈현대사회 다른 말로 후기기독교사회, 탈기독교사회는 절대 규범을 부인하는 시대입니다. 성경의 교훈이 나와 상관없다고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동성애가 죄라고 규정하나, 이 시대 동성애자들과 세상 사람들 중 다수는 동성애는 타고난 것이니 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간음이 죄라고 말하나, 오늘날 회교국가 외에는 간음을 죄라고 규정하는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간통죄가 폐지 된지 10년이 지났습니다.
3) 더 이상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절대규범을 받아들이시는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현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세속화된 시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계시지 않고, 죽음 이후의 세계도 없다고 주장하니 천국과 지옥과 영원한 내세는 고려 사항이 아닙니다. 오직 ‘한번 뿐인 인생’, ‘지금’이 중요할 뿐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은 계시지 않고, 죽음 다음의 세계도 없으니, 각 사람의 생각대로 자기 원하는 일을 하는 시대입니다. 사사시대 마지막 모습이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삿 21:25)던 시대였는데, 지금이 또한 그런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세상 사람들에게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 말이요, 구시대의 사상일 뿐이요, 더 나아가 오늘날에는 쓸모없는 교훈으로 치부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대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가에 귀를 기울이고, 오직 성경 말씀만으로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법칙으로 삼아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의 마땅한 삶입니다.
3.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따라서 남편과 아내에게 가정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 남편과 아내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절대적인 규범, 변하지 않는 원리는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1장 3절에서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남편과 아내를 차별하거나 아내가 남편에 비해서 열등하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 둘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존귀한 자들이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남자를 먼저 지으시고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지으시고 남편으로 아내를 주관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2장 11절로 14절에서 “11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2) 그래서 성경은 아내들에게 가정에서 남편에서 복종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로 24절에서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시는 것은 아내를 차별하시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다르게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구별하여 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가정이라는 배 한척에 선장이 둘이면 배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3) 뿐만 아니라, 남편들을 향하여서는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로 28절에서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이 드십니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사랑하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아내에게 복종하는 말씀도 본성으로는 행하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 줌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 또한 본성으로는 행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남편들에게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심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과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신 것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 같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자기 자신 같이 사랑하는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며, 또한 교회는 얼마나 그리스도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시고자 가정에서 아내에게는 순종을 남편에게는 자기 자신 같이,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을 명하신 것입니다.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고, 성령께서 은혜를 더하여 주시기에 믿음으로 이런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들은 하나님께서 아내에게 복종이라는 어려운 멍에를 씌우셨다고 생각하거나 말해서는 안 되며, 남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곧 죽기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너무 과도한 명령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답게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4. 본문으로 돌아와서 먼저 1절에서 믿지 않는 남편에서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아내의 선한 행실 곧 믿지 않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일을 통하여 그 남편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1) 먼저 우리는 이 서신이 기록될 당시 로마 시대의 가정의 모습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는 아내가 남편의 종교를 따르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습니다. 가정의 질서와 평화를 위해서 로마 정부에서도 권장하는 바였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그리스도인이면 자동으로 아내와 자녀들도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내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남편이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거나, 반대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내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경우에 아내는 남편에게 참된 구원의 길,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복음을 전하였을 것입니다. 이때 남편이 아내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 받았다면 참으로 감사하고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아내를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문제 뿐 아니라, 가정의 모든 결정권을 남편이 가지고 있던 시대에 아내가 남편과 다른 종교를 갖는다는 것은 남편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또한 그 시대 사람들은 다신론의 신관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신들을 섬겼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만 섬기며,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도 않고, 타협하지도 않으니 믿지 않는 남편 중에서 이것을 이해하고 받아줄 남편을 찾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 그리스도인은 남편의 권위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권세에 먼저 순종해야 하기에 남편이 예수 믿지 말라고 해도 그것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르는 남편들은 예수 믿는 아내에게 그 신앙을 포기하라고 설득하고, 회유하고, 압박하였을 것이며, 그래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면 핍박이 따랐을 것입니다.
2)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에서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가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라고 하시는 말씀은 바로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불신 남편을 둔 아내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런 남편을 전도하여 “구원을 받게 하”는 방식이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고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나와 신앙이 다른 남편, 그래서 나를 핍박하는 남편과 관계를 정리하고, 마음 편하게 신앙 생활하라고 가르치지 않고, 도리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이유는 그 남편을 전도하여 “구원을 받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여 믿는 아내를 핍박하는 남편을 둔 여성도에게 그 남편과 함께 살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면 1세기 로마에서 기독교는 가정을 파괴하는 집단이라고 소문이 나고, 핍박은 더 거세졌을 것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아내가 가정에서 해야할 첫 번째 일은 믿지 않는 남편을 전도하여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남편에서 순종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핍박을 받아도 원수를 갚지 않았습니다. 때리면 맞았고, 죽인다고 하면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순교하셨습니다.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해진 것이 1세기 후반이었는데, 200년이 조금 넘는 시간 10번의 대 박해를 겪었으나, 그 과정에서 예수님처럼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벧전 2:23)할 때에 312년에 기독교는 공인되었고, 복음이 증거 되기 시작한 이래 300년이 되지 않아 기독교가 로카의 국교가 되었고 로마를 접수하였습니다.
3) 전도는 일차적으로 복음을 말로서 증거 하는 것이나, 말로서 하는 전도가 실패할 때에는 “말로 말미암지 않고... 행실로 말미암아” 전도 대상자를 삶으로 전도하여 “구원을 받게” 할 수 있다고 베드로 사도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는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말로 전하는 복음의 증거자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 행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더욱 되어야 하겠습니다.
5. 오늘 본문 2절에서는 구체적으로 믿지 않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삶, 말로만 아니라,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그 남편을 구원받게 하는 삶은 그 아내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삶을 봄”으로 이루어진다고 말씀합니다.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1) 여기서 말씀하는 예수님을 믿는 아내들이 행하는 “두려워”함과 “정결한 행실”은 누구 앞에서 행하는 것입니까?
남편을 두려워하며 남편에게 핍박을 덜 받기 위해서 정결한 행실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두려움의 대상과 정결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남편이 예수님을 믿는 아내를 핍박하더라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 거룩한 두려움으로 믿지 않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정결한 삶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2) 여기서 두려워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위하여 자신을 절제하고 인내하고 헌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내가 나를 구원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하는 두려움을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7장 10절로 11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 대해서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할 때 두려워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은 성도로 하여금 그 일을 이루고자 하는 열심 있게 한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5. 오늘 본문 3절로 4절에서는 하나님을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삶, 곧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아내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행하는 정결한 삶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3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1) 먼저 3절에서는 금지하는 단장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를 단장하는 것은 사치와 죄를 부추기는 이방여인들의 단장법입니다. 그렇다고 베드로 사도가 여인들에게 어떤 경우도 꾸며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 검소한 화장과 치장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도를 넘는 치장과 화장으로 단장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당신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과시를 위해서, 또는 ‘당신들은 나처럼 단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알라’고 다른 사람을 자극하는 단장, 경쟁을 부추기는 단장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집에 보석이 아무리 많아도 교회 나올 때는 그것으로 치장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4절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아내들로서 마땅히 해야할 단장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단장하라고 하십니다. 이 단장은 외모를 꾸미는 단장이 아니라, 내적인 단장을 말씀하는데, 이렇게 단장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① 여기 “마음에 숨은 사람”은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속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말씀할 때 “속사람”입니다. 또한 이 “마음에 숨은 사람”은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을 따라서 사는 옛 사람이 아니라, 에베소서 4장 23절에서 말씀하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말합니다.
② 이 “마음에 숨은 사람” 곧 “속사람”이요, “새 사람”의 단장법은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는 단장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온유함은 예수님의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성품을 말할 때의 온유입니다. 이 온유는 자기 권리를 다 주장하지 않으며, 이 땅에서 어떤 부당한 고난을 당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를 죽이신다 하여도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자인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태도가 온유함입니다. 이 온유함은 예수님 없이 살다가 지옥가야 마땅한 나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구원하여 주셨으니 어느 것도 불평할 수 없고 오직 감사할 것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성도의 마땅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믿는 여성도들은 믿지 않는 남편이 나의 신앙을 알지 못하여 나를 핍박한다 하여도 그 남편에게 말이 아닌 행실로 전도하기 위하여 순종할 때 온유함으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잠언 21장 19절에서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남편을 전도하려는 아내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온유함이라는 말입니다. 전도를 위해서 남편에게 순종하되 온유함으로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가 “안정한 심령”으로 단장하는 것입니다. “안정한 심령”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헤쉬키우 프뉴마토스’인데, ‘조용한 영,’ ‘조용한 심령’이라는 뜻입니다. 이것도 예수님을 닮은 모습입니다. 우리 주님은 핍박하는 자들 앞에서 말로 대항하시거나 무죄하심을 항변하지 않으셨습니다.
고난 받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언한 이사야 53장 7절에서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은 예수님을 닮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아내들이 남편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아름다운 외모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온유하고 조용한 심령으로, 때로 침묵하고, 할 말이 있을 때는 남편의 화가 가라앉아 자기 말을 경청할 준비가 되어있을 때, 온유하고 조용한 심령으로 남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자신의 뜻을 잘 전달하는 것이 남편에서 순종하는 아내의 모습이요, 아내가 이렇게 단장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6. 오늘 본문 5절로 6절에서는 구약의 거룩한 부녀들도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고 말씀하면서 그 예로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를 들고 있습니다.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1) 서두에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아내에게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가정을 세우실 때 주신 질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구약의 거룩한 부녀들도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고 말씀합니다.
① 그 예로 든 여인이 사라인데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0)라고 말할 때 사라가 장막 문 뒤에서 듣고서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세기 18장 12절)라고 말한 것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사라가 이삭을 낳을 때 나이가 90세였다고 말씀하는데, 90살이 다 된 여인이 그 남편을 “내 주인”이라고 부르면서 남편에서 순종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라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의 질서를 존중했다는 말입니다.
② 거룩한 부녀 중의 한 사람인 리브가도 이삭을 처음 만났을 때 너울로 얼굴을 가림으로 남편 이삭에 대한 존중과 예의를 표하였습니다.
③ 또 다른 거룩한 부녀인 야곱의 아내들인 레아와 라헬도 야곱에게 순종하였습니다.
야곱이 20년간 외삼촌 집에 머물다가 그 집을 떠나기로 하였습니다. 야곱 입장에서는 외삼촌의 집이지만, 레아와 라헬은 나고 자란 그 집을 야곱이 떠난다고 할 때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창 31:16)라고 기꺼이 나고 자란 아비 집을 야곱과 함께 떠났습니다. 이 여인들은 남편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여,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순종하는 여인들이었습니다.
7. 그러나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베드로 사도가 아내들을 향하여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권면할 때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하신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1) 여기서 말씀하시는 “이와 같이”이 첫 번째 의미는 바로 앞 구절인 베드로전서 2장 25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에 비추어서 “이와 같이”입니다.
곧 남편에서 순종하는 것이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온 성도의 마땅한 삶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는 모든 피조물의 머리는 사람인데,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뱀이 하와를 미혹하였고, 하와는 머리인 아담을 넘어지게 함으로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이 땅에 범죄와 타락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가 뒤집힐 때 찾아왔습니다.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서 주신 바른 길을 가는 삶, 곧 질서에 순응하는 성도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질서에 따라서 아내가 남편에서 순종할 때 말로만이 아닌, 아내의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으로 순종할 때 그 행실로 말미암아 남편이 구원을 받게 하는 통로가 된다고 말씀입니다.
2) 두 번째 “이와 같이”의 뜻은 그 몸으로 고난을 받으사 우리에게 본을 끼치신 예수님을 닮는 사람으로서 “이와 같이”입니다.
지난 시간에 그리스도를 본 받아야 하는 것을 2 가지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부당한 고난을 당하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부당한 고난을 당하신 것을 닮아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둘째는 주님께서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신 것은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인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닮아야 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주님처럼 부당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8. 믿는 아내들이 믿지 않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 부당한 고난이 되며, 또 어떤 면에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삶이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남편에게는 아내를 자기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남편이 이렇게 하면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을 아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남편은 자기가 아내를 이렇게 사랑했는데, 아내가 순종하지 않아도 그 사랑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남편이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지 못해도, 곧 주님이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남편이 아내에게 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남편이 아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신앙을 포기하라고 설득하고 회유하고 압박하고 더 나아가서 핍박을 가할 때 조차, 그런 부당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한다면 바로 이것이 구원의 주님을 닮은 부당한 고난을 당하는 일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렇게 사는 삶은 내 본성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는 삶인데, 이 삶은 곧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9.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성도들은 고백하며 그 고백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시어서 나에게만 까다로운 남편이나 아내를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남편이나 아내를 주신 것이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각자에게 딱 맞는 남편과 아내, 나에게 믿음으로 세우라고 나에게 딱 맞는 남편과 아내를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성도의 삶은 이 땅에서 섬김의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룻기에 보면 나오미에게는 두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오르바와 룻이었습니다. 그녀들의 남편 곧 나오미의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결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자녀가 없이 죽었습니다. 나오미는 자기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에 모압 사람이던 두 며느리에게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서 각기 남편을 맞아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르바는 그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입 맞추고 자기 어머니의 집으로 떠났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새로운 남편을 만나서 안정된 가정도 꾸렸을 수도 있습니다. 고난이 없는 편한 삶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룻은 남편도 없는 여인이었으나, 시어머니를 섬기기 위해서만 온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라고 고백함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을 살고자 함께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룻은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삶이 바로 시어머니를 섬기는 삶으로 이해를 하였고, 시어머니를 섬기는 그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신앙적인 이유가 아니라면 어떻게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여인이 시어머니를 섬기려 하겠습니까? 오늘날 누가 이런 선택을 한다면 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였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결단하고 자기 고향 땅인 모압에서 새로운 남편을 만나 편안하게 살 길을 뒤로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살기를 소원하여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추수 밭에 나가서 하루 종일 이삭을 줍는 수고를 아끼지 않은 룻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보아스와 만나게 하셨고, 보아스와 계대 결혼을 하게 하셨고, 결국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는 은혜, 모압의 여인으로 태어났으나, 메시아의 조상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 곧 본성의 요구대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기를 결단하고 그런 삶을 선택한 사람들을 통하여 영광을 나타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들에게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는 아내들이 믿음을 핍박하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그 몸으로 나무에 달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에 대한 저주를 대신 받아 주신 것을 믿고,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과거 그리스도 밖에서 마땅히 가야할 인생의 바른 길을 잃어버렸던 자리에서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온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삶은 주님의 이름과 그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 부당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며, 또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삶입니다.
남편이 나를 자기 자신 같이 사랑해 주지 않아도, 주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지 않아도, 도리어 남편이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나를 핍박함으로 부당한 고난을 당한다 하여도, 남편을 나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고자,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순종하며, 나의 본성은 ‘왜 이런 남편에서 순종해야 하는가’ 하는 마음이 들지만, 그 마음을 이기고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의 삶을 살기 위하여 눈물 흘리며 씨를 뿌리는 순종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시는 삶인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온 삶을 살아가는 귀한 여성도님과 또한 이 말씀의 원리로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