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예배 베드로전서 강론(17)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온 삶"
베드로전서 2장 24절로 25절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1. 오늘 본문 24절에서 우리의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가장 큰 이유는 구원받은 성도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를 지옥형벌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천국의 백성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구원받은 천국백성으로써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자로 만드시려고 우리 죄를 담당하셨는지를 24절에서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포함한 베드로전서 2장 18절로 25절 말씀은 한 단락으로 구성된 말씀입니다. 본문이 포함된 문맥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신 이유가 24절의 말씀과 같이 ‘우리를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시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21절에서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을 본 받아 우리도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의 자취를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부당한 고난을 받는 자로 살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었습니다.
2) 이제 저와 여러분 모두는 우리를 대속하여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우리의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신 예수 그리스께로 돌아온 자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온 삶은 18절로 25절 말씀의 문맥에서 찾는다면 말씀 드린 대로 2가지입니다.
① 하나는 19절로 21절에서 가르쳐 주신대로 죄가 있어 매를 맞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의로운 일을 하실 때 부당한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 모두도 예수님처럼 선과 의를 행할 때 부당한 고난을 당하게 되는데 저와 여러분 모두도 예수님처럼 부당한 고난을 당하는 자들로 살아가게 하시려고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② 다른 하나는 오늘 본문 24절에서는 말씀하는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그리스도께 돌아온 삶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삶’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 볼 때 말씀을 잘 깨닫고 깨달은 말씀대로 순종하게 하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의 은혜를 충만히 베풀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2. 먼저 오늘 본문 24절에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1)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이 달리신 “나무”는 십자가를 말씀합니다.
나무가 십자가인 것을 사도행전 5장 30절과 10장 39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5: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10: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려 죽으셨다는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아 죽은 자라는 말과 같은 표현입니다.
이 사실을 구약 성경 신명기 21장 22절로 23절에서 “22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죽어야 마땅한 죄를 범한 자를 처형하는 방식이 나무에 사람을 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2)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저주를 받으셔야 할 만한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은 죄가 하나도 없으신 분이신데, 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3) 죄가 하나도 없으신 예수님이 나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시고 죽으신 것은 죄 없으신 예수님 자신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 당하신 저주였습니다.
이 사실을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무 곧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시고 죽으신 것은 율법대로 살아야하나 율법대로 살지못한 우리를 대신해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율법대로 살지 못한 저와 여러분의 저주를 대신하여 받으신 저주라는 말씀입니다. 스가랴 13장 7절에서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양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목자가 죽으실 것을 예언해 주신 말씀입니다.
스가랴 12장 10절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처럼, 택한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시고 달리신 십자가에서 창에 찔리실 것을 말씀해 주신 대로, 예수님은 나무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난과 저주의 죽으심이 베드로전서 2장 19절로 21절에서 말씀하시는 죄가 있어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선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당하는 부당한 고난이었습니다.
3.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고자 하실 때, 그 일을 하늘의 천사들에게 맡기시지 않으시고, 또한 어떤 사람을 통해서 이루라고 하신 일이 아니라, 친히 그 몸으로 나무에 달려 물과 피를 다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 죄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1)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저주는 천사들이나 어떤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한 대속은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몸을 입은 자가 감당해야 하나 죄가 없는 참 사람이 감당해야 합니다. 아담의 후손은 모두 죄인이니 대속자의 자격이 없습니다.
또한 사람으로서는 택한 백성 모두를 위한 저주의 죽음을 받으실 때 온전히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참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 대신 나무 십자가에 참 사람과 참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를 시키시지 않으시고 친히 우리를 위해서 참 사람으로서 고난과 저주를 받으셔야 할 이유에 대해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39문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중보자가 사람이실 것이 필요하였으니 이는 우리의 성질을 승진시키시며, 율법에 순종하시고 우리의 성질로 우리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대언하시며, 우리의 연약을 체휼하시기 위함이었으며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양자의 명분을 받고 위로를 받으며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오직 죄 없는 참 사람만이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아니라, 친히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죄가 하나도 없는 참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시고, 그 죄가 없으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대신 나무에 달려 우리의 죄에 대한 저주를 받으신 것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참 사람이실 뿐 아니라, 동시에 참 하나님이셨는데, 나무에 달려 택한 백성을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셔야 할 중보자가 하나님이셔야 할 이유에 대해서 대요리문답 38문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중보자가 하나님이실 것이 필요하였으니 이는 인성을 유지하시며 지키시어 하나님의 무한한 진노와 사망의 권세 아래 몰락되지 않게 하시며, 그의 고난과 순종과 대언에 가치와 효력을 부여하시며,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그의 총애를 획득하시며, 한 친 백성을 사시고 자기 영을 그들에게 주시며 그들의 모든 적을 정복하시고 그들을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려 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참 사람과 참 하나님으로 오시어서 저와 여러분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하는 저주를 우리 대신 짊어지시고 나무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셔야 마땅한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2)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님이 가지고 계신 그 무엇을 허비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자신을 드려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그 무엇 중의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사람이 되신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에베소서 5장 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방식은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도 그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시고 있습니다. 그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을 위해서 부당한 고난을 받는 것과,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삶이라고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6절에서는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 모든 사람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택한 백성 모두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자께서는 성부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자들을 위해서 “자기를 대속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디도서 2장 14절에서는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주님께서 자신을 주신 이유가 우리를 불법을 행하는 자리에서 깨끗하게 하시고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가 백성을 삼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 선한 일이 오늘 본문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부당한 고난을 기쁨으로 받는 것이고,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삶입니다.
3)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4.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의 가치는 얼마나 되는 것입니까?
저와 여러분의 가치는 우리가 받은 은혜 분량만큼의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벧전 2:24)해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엡 5:2)이 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택한 백성인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딤전 2:6) 내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딛 2:14)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택한 백성인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롬 8:32) 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가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내어 주시고 구원하여 주셨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죄를 그 몸으로 담당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지불하신 값은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신 만큼의 가치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헤아릴 수 없고, 계산할 수도 없는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가치는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가치 만큼입니다.
이런 존귀한 값을 치르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죄의 저주에서 해방하여 하나님나라의 백성과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기쁘지 않을 수 없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고, 세상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여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하는 것입니다.
5.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주 예수께서 친히 나무에 달리사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가치에 더욱 눈을 뜨고, 우리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은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1) 세상 사람들도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살아갑니다.
1880년대 고등학교를 다닌 미국의 하워드 켈리 박사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 방문 판매를 하며 학비를 벌었는데, 무더운 날 배가 너무 고파서 어느 집에서 식사 한 끼를 부탁하려 했으나, 용기가 나지 않아 물 한잔을 달라고 했는데, 그 학생의 초라한 모습을 본 젊은 여인이 물 대신 커다란 우유 한 잔을 대접하였습니다. 그 학생이 우유 값이 얼마인지를 묻자 그 여인은 ‘어머니께서 선행에 대가를 받지 말라고 가르치셨어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학생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수십 년 후 그 여인은 중병에 걸려 대도시 큰 병원으로 실려 왔고, 마침 우유를 대접 받았던 하워드는 그 병원의 유명한 의사가 되어 있었는데, 그 여인을 알아보고 정성을 다해서 치료해 주었습니다. 치료가 다 끝난 후 병원비가 많이 나올 것을 염려한 여인의 병원비 청구서 봉투에 ‘우유 한 잔으로 모두 지불 되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배고프고 어린 시절 받았던 친절을 병원비로 되 값아 준 아름다운 사연입니다.
2)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과 비교할 수 없는 너무나 큰 은혜를 부모로부터 받고 자라고 성장하였는데, 철이 들이 않으면 그 사랑을 기억하지 못 하고 살아갑니다.
1년 12달 365일을 아침밥을 해 먹는데, 어느 날은 입맛이 없다고 그냥 나가서 부모의 마음을 허전하게 하기도 하고, 자신이 해달라는 것을 해 주지 않으면 “왜 낳았느냐? 해 준 것 뭐가 있느냐? 이럴려고 나를 낳은 것이냐?” 라고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낙망하게 하는 때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인천 시에서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성인이 될 때까지 1억을 지원한다고 하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1억을 지원해 준다고 해도 그 것 때문에 아이를 낳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데, 1억이라는 돈이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을 사실이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고생과 물질과 시간과 정성이 투입되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은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이성 없는 짐승과 바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3) 그런데 모든 인생들은 부모 사랑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①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에게 허락하신 일반 은총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 하반절에서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농부가 똑똑하고 부지런해서 농사를 잘 짓는 것 이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시고 햇빛을 비추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부가 만선을 이루었다면 첫째는 하나님께서 바다에 수많은 물고기가 번성하게 하신 것이기 때문이요, 둘째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이 아니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만선의 기쁨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7절에서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니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합니다. 일반은총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그리스도인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② 더욱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베풀어 주신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그리스도인들은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나라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세상의 대단한 볼거리와 먹 거리와 즐길 거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영광의 나라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은 오직 하나인데, 곧 저와 여러분을 죄로 인한 저주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과 저주를 대신 받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기 위해서 당신의 생명과 피로 대속하여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의 백성과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값은 예수님의 생명과 피 값입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피로 값 주시고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사 내신 것입니다. 이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격이 우리 심령에 충만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다윗은 시편 51편 12절에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라고 기도하였는데,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매일 매순간의 간구이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매 순간 “주의 구원의 즐거움”으로 충만하고, 우리의 심령에 주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드리고자 하는 “자원하는 심령”을 충만히 부어 주신다면, 이 보다 성도는 더 행복할 수 없고, 이 기쁨과 이 자원함으로 충만할 때 주님께서 명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온전히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6. 오늘 본문 24절 하반절에서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나음을 얻었”다는 말씀은 육신의 질병에서 고침을 받았다는 말씀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가 영적으로 산 자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 이사야 53장 5절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는 말씀의 인용구절 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그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영적으로 산자가 되었습니다. 영적인 죽음은 아담이 범죄 함으로 하나님과 생명의 교통이 끊어진 것이 영적인 죽음인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 생명을 얻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 죄 때문에 찔리시고 상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나음 곧 하나님과 누리는 평화입니다.
7. 오늘 본문 25절에서는 예수님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나음을 받은 성도의 삶이 양처럼 길을 잃었던 자리에서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이신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이사야 53장 6절에서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각기 원하는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기뻐하시는 길을 잃어버리고 사망의 길을 가던 자들이었는데, 이런 자들의 모든 죄악을 “그에게” 곧 예수님께 담당시키심으로 오늘 본문 25절의 말씀과 같이 생명의 길을 잃어버리고 사망의 길을 가던 저와 여러분이 이제 바른 생명의 길을 찾았고,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신 예수님께 돌아온 자들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 이제 예수님 때문에 저와 여러분은 생명의 길을 잃어버리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생명 길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2)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 된 저와 여러분, 구원받은 성도들이 나아가야 할 길도 또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가야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삶은 예수님과 연합된 삶입니다.
8.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 여기 “목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포이멘’인데, 양을 치고 돌보는 목자를 말합니다.
이 목자라는 단어에서 오늘날 주님의 양 무리를 목양하는 목사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목자로 그 백성을 양떼로 비유하여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시편 23편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시편 100편 3절에서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양떼인 것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잃은 양떼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선한 목자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로 11절에서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길을 잃은 양떼인 저와 여러분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선한 목자로 이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양떼인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우리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우리의 영혼의 참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의 양떼 된 저와 자와 여러분은 목자의 음성을 잘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2) 예수님께서는 우리 영혼의 목자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감독”도 되십니다.
“감독”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피스코포스’인데 이 말은 ‘에피’와 ‘스코포스’의 합성인데, ‘에피’는 ‘-위에’라는 단어이고, ‘스코포스’는 ‘주목하여 본다’는 뜻으로서 ‘에피스코포스’는 ‘위에서 주목하여 보는 사람’의 뜻을 가진 단어이기에 ‘감독, 관리자’라고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이 헬라어 단어에서 영어의 감독관(Overseer)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이 감독이라는 말에서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장로라는 직분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시며, 또한 잘 못된 길로 가는지 바른 길로 가는 지를 지켜보시고 우리의 삶을 지도하시는 감독이십니다.
예수님이 대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과거 양처럼 길을 잃었던 저와 여러분이 이제는 생명의 길을 찾았기에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다고 하십니다.
9. 이제 우리는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온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첫째는 우리를 우리하여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끼친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삶인 부당한 고난을 기쁘게 받고, 슬픔을 참는 삶입니다.
가장 부당한 고난을 받으신 분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앞서 살펴 본 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심으로 친히 나무에 달려 생명을 내어 주셨고, 우리의 죄 값으로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참 사람이시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받지 않아도 될 부당하기 짝이 없는 고난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아도 마음이 불편한데, 정말 예수님은 지옥에서 영원토록 형벌 받아 마땅한 저와 여러분을 대신하여 우리를 그 지옥의 영원한 고통에서 구원하시려고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죄인을 심판하실 심판자의 자리에서 죄인된 우리를 심판하셔야 할 분께서 친히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하시는 대속주의 자리로 내려오시어서 받으신 부당한 고난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 부당한 고난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창세전에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세우신 구원의 작정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셨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셨고, 죄인 된 저와 여러분이 영원토록 죄에서 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죄로 인하여 죽어야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비천한 죄인을 위하여 눈물 흘리신 주님께서 스스로 당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서 자원하여, 기쁘게 내어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가 이 땅에서 받는 그 어떤 부당한 고난을 받는다 하여도 나는 이런 부당한 고난을 당해야하는가 하고 원망하거나 불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전할 때 선을 행함으로 오는 고난을 기뻐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 복음이 광포되는 일을 위해서 일하다가 받는 고난이 부당한 고난입니다. 이것이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벧전 2:25)온 삶입니다.
2) 둘째로 이제 저와 여러분은 24절의 말씀대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사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신 이유가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25절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온 삶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죽는 삶 곧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은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자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날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싸워야하고, 연약하여 넘어졌을 때는 즉시 주님께 나가 회개하고 죄를 이기고 의를 행할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성령님을 의지하여 우리 자신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 산 자의 삶입니다. 아멘.